별을 그리다 2007. 4. 12. 16:40

우리가 중국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할 몇 가지의 자세가 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자세와 개념의 정립 없이는 중국 역사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큰 오해를 불러와서 역사를 하나의 에피소드나 민중의 전승 담으로 가치를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의 정신적 자세는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편리하게만 외우려고 했던 연대기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는 그 유구한 시간만큼이나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또 중국의 언어나 그 기록을 위한 문자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아서, 또 역사적 사실관계를 당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한 왕조가 바뀌거나 최소한 한 세기가 흐른 후에 각자의 시각으로 해석을 붙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에 대한 시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중국의 정사(正史)라고 하는 것은 한 왕조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대륙전체와 그 많은 인민을 역사라고 하는 커다란 틀로 전부다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중국의 역사는 사실관계의 역사라고 하기보다는 유추관계의 역사라는 점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누구나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무리함이 없기 때문에 지극히 공상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중국의 고대 역사는 신화와 비슷하기 때문에, 또 문자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라도 그 해석의 방향이 천차만별이다.



세 번째는, 중국 역사는 이중성이 있다는 점이다.



즉 왕조를 중심으로 한 역사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민중을 중심으로 한 그들만의 역사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어느 것이 진정 중국의 역사인지를 분간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왕조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고, 민중의 역사도 또 중국의 역사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중국역사의 본류(本流)인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편의 기록만을 중국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큰 오류일 수 있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중국이 인류문화문명의 발상지다 보니까, 역사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문화문명이 중국으로 모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관계된 모든 국가나 민족이 또 중국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주변국의 역사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중국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로마의 역사나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역사를 모르고서 중국 역사의 진실로 접근한다는 것은 자석 없이 밤중에 바늘을 집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여러 역사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중국역사에 대해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중국을 오해해서 중국역사를 에피소드로 여긴다든지, 중국역사가 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고 폄하한다든지, 중국 역사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잃고 가장 큰 민족과 가장 큰 역사를 알지 못한 채 세계역사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방대한 중국역사를 왕조별로 비교적 잘 정리한 미국의 역사연구가 오우웬 라티모어의 저서를 기초로 해서 대략을 이해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재해석해 보자.



오랫동안 중국 역사를 연구한 선교사가 「중국역사는 너무나 요원하고 단조로우며 애매하다.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너무나 공상적이어서 역사와 우화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경역사나 영국사처럼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의 뒤를 이었다」고 하는 식의 무익한 인명록에 인간적 흥미 때문에 때때로 첩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것을 역사라고 가르쳐온 것으로부터 나오는 말이다.



아마도 그 같은 방법으로 배우는 한 중국의 역사는 세계의 그 어느 나라의 역사에 비교해도 과도하게 많은 연호(年號)라든가, 외국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인명의 어려움이라든가, 왜곡과 민담의 복잡한 가감으로 흥미를 끌지 못하는 역사로 이해하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또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 관찰자들 간의 입장과 시각이 제각기 달라 어느 것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하기 매우 모호하고, 당대에 기록 된 것보다는 수 세기동안 구전되었다가 기록되거나 2차 적 창조나 필요한 부분을 서술을 통해서만 중국사를 대하게 되므로 그 사료적 가치를 측정하기란 정말 난해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배운다면 인류의 역사상에 찬란한 광채와 선지자적인 그림자를 던지는 중국역사의 찬란한 면모를 통해 인류의 모든 역사의 용광로를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시아에서 발생한 인류의 가장 원시적인 기원으로부터 철학, 종교, 문학, 예술의 발전이 최고정점으로 이르기까지 중국의 위대한 창조적인 시대의 것을 추월하는 문화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철학과 사상뿐만이 아니라 물질문명의 방면에도 우리들은 구주문명의 기원은 거의 구주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부분이 그들이 창조하거나 발견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종이와 인쇄술, 화약과 나침반, 비단과 직조술, 음용의 차와 음식의 향신료, 도기와 피혁기술 등이 모두 그러하다.



만약에 중국인들이 피혁기술을 창조해 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그들이 들어가 살 수 있었을 것이며, 어떻게 에스키모 인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 말이다.



나침반이 단 1세기만 늦게 발명되었더라면, 오늘날의 구라파의 문명이 아메리카로 이동하는데 몇 세기를 더 많이 흘려보내야 했을지도 짐작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자랑으로, 심지어는 우월하게 까지 거들먹거리며 중국역사를 하나의 만화로 격하시키려는 그들의 역사를 어떻게 지켰을 것이며, 성서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의 그 논거는 중국의 종이와 인쇄술이 아니면 또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말이다.



역사에는 고정된 기점은 없다.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도 언제나 더욱 먼 옛날로 갈 수 있다.



역사가들이 기점을 정하는 이유는 연구를 거기서부터 시작하기 위한 일종의 기선을 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유럽인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연구하여 수많은 추리를 끌어다 붙이고 사실로 왜곡하는 것에 비하면 중국사는 아주 많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도 남을 것이다.



역사 안에는 얼마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 희미한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점차로 커다랗고 먼 사실을 발견하며 그것을 지식의 체계로 모아 역사가 오늘날에 와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일부분은 사실, 일부분은 전설, 그리고 일부분은 추측에 불과한 일종의 증거를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역사를 다루다보면 연구자의 지극히 인간적인 요소가 가미되기 마련이고, 또 다시 후대의 사람들은 그 가미된 역사의 진위를 따지느라 또 세월을 흘려보낸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보는 기선을 언제로 잡느냐? 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부연하면 사실을 보느냐? 역사를 기록한 사람의 인간적 추측과 가미된 요소를 중점으로 보느냐? 에 따라 우리가 전설을 향해 가느냐? 역사의 진실을 향해 진일보하느냐? 의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