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사랑/아랍및 아프리카
[터키] 고대도시 트로이와 앗소로의 기행
별을 그리다
2008. 3. 28. 13:18
지난 겨울 지긋지긋한 비와 추위로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기위해 고대도시 트로이(현재지명:트루바)와 앗소로의 여행을 계획하고차낙칼레행 야간 버스에 몸을 실었다.
트로이로 가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먼저는, 차낙칼레행 버스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가서 트로이로 가는 방법과 또 한가지는, 이즈밀 행 버스를 타고 가다 트로이에서 내리는 방법이 있다. 두 방법중에 필자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는 차낙칼레행을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차낙칼레에서 갈립볼리 전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여행에 또 하나의 의미를 살리수 있기때문이다.
대륙의 크기 때문에 발달된 터키의 밤버스는 이스탄불에서 약 8시간을 달려 이른 아침햇살 속에 다르다넬스 해협(갈리폴리 전적지 부근)을 건너 차낙칼레에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욱신거리는 팔다리를 두드리며 잠시 추위를 잊으려 전통 터키차 한잔을 마시며 한곳이라도 더 둘러 보겠다는 마음으로 여행사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봤지만 별 신통한 소식은 없었다.
겨울철이라 찾는 관광객도 없는지라, 운행되던 차편도 감소되어 트로이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겠는가? 일단은 차낙칼레 시내를 이리기웃 저리기웃 거리며 흙으로 만든 투박한 도자기(세라믹 도자기와는 다른 차낙칼레 특유의 도자기)를 지겹도록 구경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시간이 남아 해군 군사박물관까지 차근차근 돌아보며 곧 만나게 될 트로이를 기대해 본다.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본 트로이목마의 전설이 있는 고대 도시 트로이.
그리스의 음유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 나오는 트로이의 목마.
난공불락의 요새 '트로이'를 점령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이던 그리스군은 성문을 열지못해 번번히 공격에 실패하다가 어느날 밤 대형 목마만을 덩그러니 남겨두고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이에 트로이군은 남겨진 대형 목마를 전승기념품으로 생각하고 성안에 끌어다 놓고 밤새 축제를 벌이다 골아 떨어지는데... 이 틈을 이용해 목마속에 들어있던 그리스의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는 고대 도시 트로이와 목마.
트로이 지역에 촌락이 형성된것은 기원전 3000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곳은 오랜시간동안 역사속에 가려진채 암흑속에 있다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전설이나 신화가 아닌 실재했던 사건과 지명이라는 신념으로 연구와 발굴을 계속하던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의 집념에 의해 1868년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해도 이들 일리아드 속의 인물과 사건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색칠해 주는 신화로서만 존재했다. 그런데 지하에서 몇 천년을 잠다던 신화가 마침내 눈부신 햇빛을 받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아나톨리아의 중부지방, 갑바도기아의 북동쪽에 위치한 시바스시는 크즐으르막(붉은강) 기슭 산악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약 220마일 정도 떨어져 있다. 시바스의 원래의 이름은 세바스티아오 알려져 있다. 로마가 이곳을 지배할 당시 붙여진 이름이다.
시바스시는 페르시아와 바그다드 대상들이 긴 여행길에 지친 몸을 쉬어가는 중간 휴식처였다. 이러한 대상들이 오고가면서 이 지역의 상업도 발달하게 되었다. 시바스는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 두 제국의 뒤를 이어 아나톨리아를 지배했던 셀축은 시바스를 중심으로 아나톨리아의 정복을 전개해 나갔다. 시바스는 금세기 초까지 금과 은 세공으로 이름난 아르메니아인들의 중심 도시이기도 했다.
대 제국들이 이곳을 스쳐갔기 때문에 이곳에는 아직도 중요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셀축시대에 이슬람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이슬람 신학교가 많이 있다. 이곳은 또한 고대 히타이트인들의 수도였던 보아즈칼레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히타이트 유적들도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중앙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 해발 5천피트 고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후는 대체로 좋은 편이지만 겨울에는 매우 춥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곡물과 감자가 주로 생산이 되고 주요 산업은 시멘트, 카페트, 타일 등이다. 높은 산지이기 때문에 광산이 있다. 특히 구리가 이곳에서 많이 채취되고 있다.
한국사람들에게는 시바스가 피부병을 치료하는 물고기가 있는 캉갈온천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스탄불에서 시바스까지는 890 km 정도 된다. 캉갈 온천은 시바스시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터키 사람들이 캉갈 온천에 갈 경우는 대부분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다.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이동할 경우는 대략 12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이름있는 관광지이기 때문에 이스탄불-시바스 국내항공 노선이 있다. 요금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약 90불정도 된다.
캉갈의 온천수는 pH 7.8에 연중 35℃를 유지한다. 온천수에는 중탄산염, 칼슘, 마그네슘 등을 함유되어 있고, 식수도 가능하다. 온천욕을 통해 신경통, 근육통, 피부병, 그리고 음주에 의한 배뇨계통의 병에 치료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 적당히 마시면 위와 장이 세척되어 외부의 피부병과 함께 신체 내부의 질병 치료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피부병 환자들이다. 피부병 치료를 위해서는 식전에 3컵의 온천수를 마시고 하루에 두 차례 온천욕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오전에 4시간 오후에 4시간씩 3주간 온천욕을 계속하면 심한 피부병도 치료가 된다고 한다. 위장병 환자들에게도 온천수는 도움이 된다. 식전에 다섯 컵 정도 마시면 위장병 치료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시바스 온천이 특히 피부병 특효 온천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온천물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 때문이다. 이 물고기는 세계에서 단지 한곳, 시바스 캉갈에서만 서식이 가능하다. 이 물고기들은 잉어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고수온에 적응된 특이한 물고기다. 물고기들은 온천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몸에 부딪치기도 하고 사람들의 몸을 핥기도 한다. 좀더 공격적인 물고기들은 사람들의 손상된 피부를 뜯어 먹기도 한다.
사람들이 온천물에 몸을 담그면 물고기들이 다가온다. 사람들의 몸에 부딪치고 핥으면서 맛사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큰 물고기가 공격할 경우에는 약간의 따끔한 느낌도 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이러한 맛사지 과정에서 신경통과 근육통 환자들에게 환부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게된다. 물고기들이 온천물에 부드러워진 피부환부를 직접 공격할 경우는 약간의 출혈이 생기기도 한다. 출혈 부위를 핥으므로 치료 효과가 있다. 야외 온천장에서 온천욕을 할 때 햇빛도 함께 받게 되므로 치료효과가 더해 진다고 한다.
물고기들이 왜 사람들의 피부를 갉아 먹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수 없지만, 일반적인 추측은 온천수가 너무 고수온이기 때문에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는 플랑크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온천욕을 하던 피부병 환자들의 환부를 먹이로 얻게 된 것으로 복 있다.
온천에 서식하는 물고기들의 크기는 성장한 경우에 대략 15∼20 cm 정도된다. 이 물고기들은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한다. 가장 왕성한 성장기에 있는 2∼10 cm 크기의 어린 물고기들이 먹이를 얻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환부를 공격하기 때문에 치료에 더 큰 역할을 기여하고 있다고 한다.
시바스 캉말의 세상에 알려지면서 현대 의학에서도 관심을 가져왔었다. 의학적인 연구 결과 의사들은 물고기 입에서 나오는 액체, 온천수, 햇볕이 함께 치료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스위스 대체의약협회는 건선피부, 지루성 피부염, 신경성 피부염에 효능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시바스 캉갈 온천이 모든 피부병에 특효가 있는 것처럼 보는 견해는 좀 지나친 면이 있다. 왜냐하면 터키에서 살고 있는 피부병 환자들도 시바스 온천욕 치료를 하고 있지만, 모든 환자가 다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만나 본 피부병 환자는 수년간에 걸쳐 매년 몇 차례 시바스 캉갈 온천욕을 했지만,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듯 하다가 다시 재발된다고 했다.
이스탄불에서 열린 관광 홍보전에서 시바스 시의 홍보담당자와 면담한 적이 있다. 온천욕 치료에 대한 그의 설명으로는, 모든 피부병 환자들이 치료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주로 치료가 되었던 환자들은 신체의 외부로 발생된 피부병은 대부분 치료가 되었으나, 신체 내부의 원인으로 인해 발생된 피부병은 치료에 다소 도움은 되겠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바스 시가 터키의 여러 의사들에게 의뢰하여 조사, 연구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시바스 온천은 환자들 만이 찾는 곳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좋은 효과가 있다. 건강한 사람들이 보기에 흉한 피부병 환자들과 함께 온천을 한다는 것이 좀 게운하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지금은 건강한 사람과 환자를 구분해서 온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캉갈에는 3개는 노천 온천장이 있는데, 남자 온천장과 여자 온천장, 그리고 여름 관광객들을 위한 온천장으로 구분 되어 있다. 실내에는 두개의 온천장이 있다 역시 남자용과 여자용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곳에는 풍부한 온천물이 사철 흐르고 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흐르는 시냇가에서도 자유롭게 온천을 즐길 수 있다. 온천장을 특별히 남자와 여자용으로 구분해 둔 것은 이슬람의 남녀 구분에 대한 관습 때문이다.
이슬람 성향이 강한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남녀 공용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파묵칼레 등 외국 관광객들의 방문이 많은 개방된 지역에서는 남녀 공용이 많다. 온천장이 남녀 공용이든지, 또는 구분이 되어있든지 관계없이 온천욕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 한국의 대중탕처럼 생각하고 용감히 들어가면 모든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는 곤란한 일이 생길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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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이스탄불 - 시바스(890km)
앙카라 - 시바스(441km)
네브쉐히르 - 시바스(296 km)
(버스가 다양하게 있고, 요금도 차이가 많다)
숙소(온천호텔)
* Balikli Kaplica Oteli (542) 452-5528
(요금은 대략 20-30불 정도)
터키에서 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휴양객들이 찾는 도시는 안탈랴다. 휴양 철이 시작되는 6월경부터 안탈랴 공항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안탈랴로 직행하는 항공기들로 줄을 잇는다. 공항은 언제나 북새통을 이룬다. 안탈랴는 터키의 휴양지 중에서 단연 인기 1위에 속한다.
안탈랴가 이처럼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주변의 자연 환경 때문이다. 안탈랴 북쪽에는 테르메소스 국립공원과 해안 바로 뒤편에 솟아 있는 콘야 알바투 비치에서 쿠를란쿠치 반도까지 전 지역이 국립 자연 보호 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지중해 해안을 둘러쌓고 있는 해변 도시들은 푸른 산과 아름다운 바다로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서 편안한 휴양지로 부족함이 없다.
터키의 아나톨리아의 남부지역인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안탈리야는 페르가몬(버가모) 왕 앗탈로스 2세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앗탈로스는 이 도시를 세운 뒤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앗탈리아로 칭하였다. 그러나 현재 터키 사람들은 안탈랴로 부르고 있다.
안탈랴 지역은 기원전 1900년부터 1200년경까지 힛타이트 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아나톨리아를 첫 번째로 통일시키고 주인공이 되었던 힛타이트인들이 멸망하고 난 뒤에는 사데를 중심지로 세력을 형성하였던 리디아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리디아 왕국에 동부에서 세력을 형성해 오던 페르시아에 의해 점령을 당하게 되자 안탈랴는 자연히 페르시아의 속주가 되어 통치를 받게 되었다.
동부의 페르시아 세력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앞에 무릎을 꿇게 되자, 안탈랴는 시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알렉산더 대왕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 후 로마가 아나톨리아를 정복함에 따라 안탈랴는 기원전 67년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안탈랴는 지중해로 나가는 관문 도시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고대부터 항구 도시로 발전이 되어 왔었다. 또 작고 안전한 정박지가 많으므로 항만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는 해적들이 많았다고 한다. 역사적인 사료에 보면 당시 무역을 하던 상인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바다의 광풍이 아니라 바로 해적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BC 67년 로마 폼페이 왕이 벌인 소탕작전으로 이 지역의 해적들은 힘을 잃고 말았다. 안탈랴는 비잔틴 제국과 셀축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거쳐 현재 터키인들과 외국 관광객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휴양지로 인정받고 있다.
고대도시로서 유명한 항구도시로서 명성을 이어온 안탈야는 터키의 대표적인 리조트 지역이기도 하다. 여름 휴양지를 상징하는 야자수가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한 폭의 고풍처럼 아름다운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칼레이치 지역에는 고대의 향수와 내음새가 풍성하게 배어있다. 전통을 자랑하기라도 하듯이 나란히 힘겨운 모습으로 서있는 옛 가옥들은 안탈랴의 오랜 전설들이 숨어있는 듯 하다.
역사적인 강대국들이 줄지어 스쳐간 안탈랴에는 자연은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함없지만 고대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폐허가 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몇몇 유적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기원후 130년경 로마 하드리안 황제가 안탈랴를 침략했을 때 만들어진 하드리안 문이 있다. 안?랴의 새 주인이 된 하드리안을 칭송하기 위해 세 개의 멋진 문을 성벽 안에 만들었다. 이 문은 3개의 아치와 4개의 고린도식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도 항구 근처에는 이 문과 2개의 탑이 남아 있다.
붉은 탑이라고 불리는 크즐쿨레(Kizil Kule) 탑도 볼만한 곳이다. 이 탑을 건축하는데 사용된 붉은 돌과 벽돌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226년에 셀죽 술탄 Alaeddin Keykubat가 통치할 때 만들어 졌다. 탑의 높이는 33 m이며, 팔각형으로 된 5층 건물에 87개의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탑의 1층은 박물관으로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이 탑의 계단을 따라서 맨 위층까지 올라갈 수가 있다. 높은 탑 위에서 안?라의 시내와 해변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탑의 세워진 목적은 도시의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탑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채와 비슷한 모양이다.
안탈리야 박물관에는 안탈리야 주변 지역의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유물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고대와 그 이후에 숭배해 왔던 각종 신상들, 황제의 기념상, 모자이크, 동전 , 석관, 민속예술품 등을 볼 수 있다. 이 박물관은 1895년에 재건되었다.
아타튀르크 박물관에는 터키공화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터키의 가장 큰 도시 이스탄불에서 수도인 앙카라와 별나라를 연상케 하는 갑바도기아를 거치는 버스로 20여 시간 긴 여행길에는 터키에서 가장 큰 호수인, 반 호수가 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비행기를 탈수도 있다. 호수라기보다는 바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늦은 5월까지도 백설이 중턱에 남아있는 수타산 줄기들이 치맛자락처럼 반호수를 감싸고 있다.
염호수인 반호수는 해발 1,700미터 지역에 있다. 서쪽 타트반(Tatvan)에서 동쪽으로 반 市까지는 반경이 약 100킬로미터에 이른다. 그러니까 시속 100킬로미터를 달리는 고속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야 이 호수의 반경을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 호수의 물결은 비단결처럼 잔잔하다. 수 천년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온 주변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북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수의 물길은 죽은 듯이 멈추어져 있지 않다. 깊이가 분명치 않은 바닥에서 새로운 물길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길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아무 곳에서나 수영 실력을 자랑하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보장받지 못한다. 처음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이것을 알리가 없다. 한 여름 더위를 이기지 못하여 첨벙 물속으로 뛰어들다가 SOS를 날리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페르시아와 우리루트 왕국 등 수많은 고대 왕국들이 이 지역을 소유하기 위해 전쟁을 치렀다. 티그리스 강의 상류에 자리 잡은 반 호수는 인간의 소름끼치는 전쟁의 역사를 감추고 싶은 듯 외인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아나톨리아의 동쪽 끝에 외롭게 남아있다.
호수의 아침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물결을 가르며, 물고기를 그물에 담는 고깃배들이 두어 곳 눈에 띈다. 햇살에 못 이긴 안개가 수타산 기슭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친다. 반 호수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웅장함이 넘친다. 한 순간에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얄팍한 매력은 없지만, 삶에 지친 사람들의 다정한 친구가 된다.
작은 언덕에 세워진 강한 성
반 공항에서 북쪽을 향해 호숫길을 따라 버스로 달리다 보면, 호수 옆에 가파른 언덕에 반 성채가 보인다. 반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성채를 건설할 당시에는 반 호수로 이어지는 수상교통이 있었던 것 같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강에는 퇴적물이 쌓이게 되었다고 한다.
작은 벌판에 외롭게 솟아오른 언덕에 만들어진 성채에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파르다. 조심성이 없는 사람은 발목을 삐기 십상이다. 언덕은 높지 않아서 건강한 사람이면 5분이면 정복할 수 있다. 고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는 어디든지 제사를 드린 흔적이 있다. 이 작은 도시도 예외가 아니다. 사오십 명이 족히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있다. 바위 중앙에는 짐승의 피를 모으는 구덩이가 있고, 제사를 드린후에 피를 씻어내는 작은 도랑이 파여 있다. 오른쪽으로 좁고 아슬아슬한 길을 따라 난간을 붙들고 몇걸음 가면, 우라루트 왕의 무덤이 있다. 바위를 파서 궁전과 같이 만든 이 무덤 입구에는 우리루트 왕의 비문이 있다.
반 성채는 우라루트 왕 사르두르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곳은 고대 우라루트 왕국의 수도 투쉬바가 있었던 곳이다. 투쉬바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자리잡고, 반 호수를 정원처럼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수도였다. 당시의 성채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도시들이 건설되어 있었다. 우라루트 왕국은 강력한 대제국은 아니었지만, 당시 반을 중심으로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왕국이다. 우라루트 왕국에 관한 사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또 사료에 대한 분석도 일치하고 있지 않아서 앞으로의 연구 결과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또한 불행하게도 이 고대 도시에 남아있는 일부의 유적들이 홍수로 인해 파괴 되었다. 지금은 단지 호숫가에 있는 선착장 건축물 기초들이 쓸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이 홍수는 오스만 유적을 비롯한 아르메니아, 셀축 등의 모든 유적들을 파괴시켰다. 반 성채 주변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13세기의 사원인 울루 자미와 크즐 자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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