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사랑/아랍및 아프리카

신7대불가사의 페트라[Petra]

별을 그리다 2008. 3. 28. 13:56

 

페트라[Petra]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시대에 걸쳐 아랍 왕국의 중심지였던 고대도시.
페트라에 있는 앗데이르의 나바테아인 암굴 사원
이 도시의 유적은 요르단의 마안 주(무하파자)에 있다. 페트라는 동서방향으로 모세 계곡(Wadi Msa)이 관통하고 있는 해안단구 위에 건설된 도시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계곡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바위를 칠 때 물이 용솟음쳤다는 곳 중의 하나이다. 모세 계곡은 연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빨간색과 보라색의 암맥을 가진 사암(砂岩)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때문에 페트라를 '빨간 장밋빛 도시'라고도 부른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인데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셀라가 이렇게 바뀐 것 같다. 이곳에 갈 때는 대개 동쪽에서 좁은 시크 계곡을 따라간다. 페트라에서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이후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아랍족의 하나인 나바테아인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던 BC 312년 이전에 도시가 어떠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의 통치 밑에서 향료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106년 로마인들이 침입하여 나바테아인을 몰아낸 뒤에도 페트라는 로마 제국 치하의 아라비아 지방에 편입되어 계속 번영했으나 무역로가 바뀌자 상업이 점차 쇠퇴했다. 7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침입한 뒤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마침내 1812년에 스위스의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여행중에 발견되었다.
 
1958년부터 시작된 조사에서 영국고고학대학 예루살렘 분교와 미국동양학대학의 조사단은 로마 통치 이전의 페트라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냈다. 여러 바위 유적지 중의 하나인 앗데이르는 정면을 기둥으로 장식한 모습이 인상적이며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페트라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무덤인데, 많은 무덤이 정교한 겉모양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
사암절벽에 피어난 장미처럼 붉은도시 ‥ '요르단 페트라'
글쓴이 : 생각을바꾸면... 

 
영국 시인 존 버건이 '장미처럼 붉은 도시'라고 노래한 페트라는 요르단이 자랑하는 고대 도시 유적이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 페트라는 최근 인터넷 투표로 가린 신 7대 불가사의에도 꼽혀 새삼 주목받고 있다.

페트라는 해발 950m 고원 위의 산줄기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모래바위 산이 그 중심이다.

모래바위 산의 안과 밖은 비밀스런 협곡길로 연결돼 있다.

협곡길은 길고 또 좁다.

두 팔을 크게 벌리면 닿을 너비의 협곡길 양 옆은 까마득히 치솟은 절벽.그 절벽은 울퉁불퉁해 높은 하늘을 가리고,파열된 듯 터진 길은 갈 지(之)자 행보로 사라졌다가는 나타난다.

협곡길 끝에 이르러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진홍의 빛줄기가 '장엄한 경이'를 펼쳐보인다.

정면 매끈한 사암절벽에 뚜렷이 부각된 신전 모습의 알 카즈네.그 어떤 건축물이 이보다 더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을까.

날렵하게 뻗어 올라간 기둥들과 조각칼로 정교히 다듬어 놓은 듯한 박공장식 등이 경이로울 뿐이다.

기둥이나 박공을 따로 만들어 세운 것이 아니고 그 높은 수직절벽을 손으로 깎아 만들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는다.

2층 구조인 알 카즈네 꼭대기에는 항아리 모양의 부조가 있는데,이집트의 파라오가 거기에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카즈네(보물창고)란 이름이 붙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화려한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허전할 정도로 텅비어 있다.
누군가 내부의 장식품을 모두 훔쳐간 것이 아닐까.
알 카즈네는 사실 대부분의 페트라 유적과 마찬가지로 무덤이라는 말도 있다.

과연 누가 솜씨를 부렸을까.
지금의 베두인족의 조상인 아랍계 나바테아인이 주인공이라고 한다.
나바테아인은 기원전 600년부터 이곳 페트라에 정착했다.

페트라는 원래 성경속 이삭의 장남인 에서가 이끌던 에돔족의 땅이었다.
그런데 바벨탑을 세운 신바빌로니아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2세가 이스라엘 유다왕국에 침입해 사람들을 바빌론으로 잡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에돔족은 이틈을 타 유다왕국으로 이주했고,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의 차지가 된 것. 나바테아인의 페트라는 크게 번성했다. 자체 동전을 주조해 유통시킬 정도로 큰 이지역 무역거점이었다.

실크로드와 왕의 대로를 비롯한 동서남북을 잇는 교역로가 모두 페트라를 거쳤던 것.성경속에서 아기예수를 찾아 온 동방박사들이 유황과 금 그리고 몰약을 페트라에서 구했다고 한다.

길로 인해 번성한 페트라는 그러나 길 때문에 쇠락의 길을 걸었다.

기원 후 2세기께 이 일대를 수중에 넣었던 로마가 교역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급속히 위축되는 운명에 처했다.

상인들은 또 다른 무역거점으로 흩어져 로마시민으로 흡수됐고,탈주노예들이 그 공백을 메우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도시로 전락했다.

새로운 길이 뚫려 차와 사람이 그 길로 이동하면 이름조차 희미해지는 '옛길의 운명'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페트라가 부활한 것은 1812년이다.

스위스 탐험가 요한 루드빅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면서 1600여년의 긴 어둠에서 벗어났다.

알 카즈네 옆으로 이어지는 길가의 사암절벽에도 크고 작은 신전 모양의 부조가 보인다.

크기만 다를 뿐 모두 알 카즈네와 비슷하다.

굵은 기둥이 늘어선 열주로,있는 그대로의 바위를 깎아 33층의 계단식 의자를 만든 3000명 수용규모의 원형극장 등 로마시대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알 카즈네와 함께 페트라를 상징하는 대사원도 웅장하다.

대사원은 노새도 힘들어하는 절벽길을 1시간 이상 걸어 올라야 만날 수 있다.

8개의 2층 기둥으로 되어 있는 대사원은 폭 40m,출입구 높이만 8m에 달한다.

역시 사암절벽을 깎아 만든 것이다.

원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내부 벽면에 몇 개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어 대사원이라고 부른다.

대사원 앞 광장 건너의 작은 바위산이 필수코스다.

지평선까지 뻗은 발아래의 깊은 협곡 풍광이 페트라 유적과는 사뭇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바위를 깎아서 만든 페트라신전



















페트라 신전
 
 페트라 관광객을 위한 낙타들.
 페트라의 로마원형극장
 페트라의 모나스트리(수도원).
 바위를 깍아 만든 페트라의 건축물
 바위를 깍아 만든 페트라의 건축물
 페트라의 붉은색 바위 계곡
 페트라의 비잔틴교회 바닥 모자이크
 페트라의 비잔틴교회 바닥 모자이크.
 페트라의 사람 얼굴 모양의 바위.
 페트라의 알카즈네
 페트라 바위산 전경.
 페트라 중앙 시가지 터.
 페트라 관광 경찰들
 
 
 
세계문화유산 7대 부가사의에 지정된 페트라, 고대도시의 웅장함과 섬세함에 혀를 내들 것임에
영화 인디아나조스의 배경이었다 함....
 
요르단 페트라
사암을 깎아 만든 나바티안의 붉은 도시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150킬로미터.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묘사됐듯이 페트라는 전체가 붉은 사암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신비의 천연요새로, 마치 지하 왕국을 연상시키는 도시다.
 
  중동을 돌아다니는 배낭족들은 오직 두 가지만 캐묻고 다닌다. “페트라에 가봤니?” 그리고 “페트라에 어떻게 가니?”

  분쟁이 끝없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불과 한 시간이면 요르단 국경을 넘는다. 작은 나라이지만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4시간 거리에 신비한 도시 페트라가 숨어 있다.

  기원전 이 땅의 고대민족 나바티안들이 만든 도시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왕의 길’ 고속도로를 타고 남하하면 모세의 계곡이 나온다. 페트라는 그 계곡에 있다.

  나바티안 족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이곳 암석지대를 찾아내 도시를 건설했다. 바위는 산화철이 장미 봉오리 같은 화려한 무늬를 새겨넣은 사암이었고, 나바티안들은 그 연무른 사암을 쪼고 깎아 숱한 건축물을 남겼다. 깎아내기 쉬운 사암이기에 비를 피할 동굴을 뚫기 쉬웠고, 신전과 무덤을 깎기도 쉬웠다.

  그리스·로마 양식과 나바티안 특유의 건축양식을 혼합한 도시를 그들은 ‘렉무(Rek Mu)’라 불렀고, 훗날 그들이 역사에서 사라진 뒤 그리스인들은 ‘페트라(Petra)’라 불렀다. 모두 ‘바위’라는 뜻이다.

  서기 2세기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도 번성했지만 페트라는 4세기 말, 로마가 제국의 중심지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세계지도에서 사라졌다. 세계의 동과 서를 잇던 실크로드가 그 축을 페트라에서 북쪽 다마스쿠스 쪽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교역에서 오는 부(富)를 상실한 뒤로 페트라에는 700여 년 동안 나바티안의 후예 베드윈 족만 살고 있다가 1812년에야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 헤매던 스위스 탐험가 버크 하르트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라는 뜻의 ‘페트라’
   
페트라는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모든 것이 어느 하나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절벽을 위에서부터 깎아내려 만든 건축물로 가득했다. 협곡에 이르는 평탄한 길섶에는 네모난 거석들이 침묵했다. 나바티안의 무덤이다. 베드윈 젊은이들이 거칠게 말을 몰며 스쳐갔다. 눈 앞에 갑자기 어둠을 숨긴 협곡이 솟아 올랐다.

  갑자기 내 주위에 바위와 절벽이 솟구쳤다. 그들의 발판은 대지였으며 그들의 왕관은 하늘이었으니. 

  - 1845년 페트라 초기 탐험가 존 버건


  흥분 속에 어둠을 향해 걸음을 뗀다. 한 발짝 씩 걸음을 떼면서 신이 바위에 얽어놓은 무늬와 색채에 감탄한다. 암벽 아래에는 경사를 치밀하게 계산해 만든 수로가 패여 있다. 연보라, 분홍, 적(赤), 그리고 푸르름. 그 무늬와 색이 너무도 현란하여 걸음을 멈춘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어느 틈에 사람들은 눈 앞과 좌우에서 몰려오는 미학에 흥분할 대로 흥분해 있다.

  “10, 9, 8, 7…!” 뉴질랜드에서 온 관광객들이 카운트를 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알 카즈네(Al Khasneh)! 그 ‘보물 창고’가 마술처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도 극적이어서 그 누구도 ‘침착하게’ 관람을 할 준비가 돼 있지 못했다. 카운트는 정적으로, 정적은 몇 초 뒤 협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탄성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길고 긴 2킬로미터 협곡 끝에서 분홍빛 광채를 발하고 있는 신전을 마주 대하고는 집단 최면에 걸린 듯 한꺼번에 이성을 잃어 버리고 뜻 모를 탄성만을 쏟아냈다.

  1989년 영화 ‘인디애나 존스 - 마지막 십자군’의 주인공이 말을 타고 맹렬하게 도주하던 장면을 이 곳에서 찍었단다.
 
온통 분홍빛의 신비한 협곡
  알 카즈네 광장 오른쪽 통로 양편으로 협곡은 마지막 웅자를 보인 뒤 사라지고 거기에는 넓디넓은 분지가 펼쳐졌다. 태양 아래 모든 것은 분홍빛이다. 오른편으로 ‘왕가의 무덤’이, 왼편으로 로마식 원형 극장이 있는 길섶에 찻집이 하나 있다.

  이튿날 다시 찻집에 당도했을 때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는 행운이었다. 찻집을 나와 입구를 향해 발길을 돌리는 순간,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아까 지나왔던 무덤과 협곡과 바위는 사라지고 분홍빛이던 암벽은 검은 줄무늬로 뒤덮였으며 협곡 바닥에는 개울이 찰랑거렸다. 조금 전 분명히 몇 줄기 지층이 또렷했던 암벽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반짝반짝 빛났다. 사람들은 거센 빗줄기가 중단시킨 여정을 아쉬워하면서도 그 새로운 모습에 흠뻑 빠져들어 숙소로 돌아갔다.

  거짓말처럼 맑게 갠 그 다음날, 사람들은 서둘러 페트라에 다시 모여들었다. 알 카즈네 앞에서 열 아홉 먹은 아이 솔로몬이 길을 인도했다. 제단(High Place)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다는 그의 뒤를 좇아 알 카즈네 왼편 가파른 계곡을 올랐다. 솔로몬은 30분 만에 제단 건너편 산정으로 나를 이끌었다.

  건너편 계곡 위로 나바티안들이 하늘에 희생양을 바치던 제단이 보였다. 그 너머 호르(Hor)산 꼭대기에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하얗게 빛났다.

  애급을 탈출한 모세의 무리는 페트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그 길목에서 아론이 죽었고, 모세는 200킬로미터 북쪽 네보(Nebo) 산에서 죽었다고 했다.

  당나귀가 졸고 있는 찻집을 지나 제단에 오르면 페트라 전체가 내려다 보인다. 붉은 도시 곳곳에 무덤과 동굴들이 뻐끔뻐끔 입을 벌리고 있다. 찻집에서 한숨을 돌리고 반대편 길을 따라 ‘엘 데이르(El Deir, ‘수도원’이라는 뜻)’로 갔다. 당나귀를 타고 갔다. 당나귀는 이방인을 싣고 잘도 걸어 올라갔다.
 
자연의 마법에 취할 수 있는 곳

  수도원은 기괴하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바위 계곡 끝에 있다. 이스라엘 쪽 하늘이 막 석양에 물들려는 참이었다. 까마득한 벼랑 끝에 난 오솔길을 걸어 모퉁이를 돌자 육중한 수도원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원은 석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가나안과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땅이 보이는 이 곳에 동 로마시대 기독교 은자들은 수도원을 만들었다.

  하루를 감상할 때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순간 만큼 극적인 시간은 없을 것이다. 구체적인 윤곽에 머물러 있던 시선은 그 순간 하늘과 실루엣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수도원에서 완전히 내려왔을 때 그 ‘마술의 순간’이 찾아왔다. 현란하게 사람들을 어지럽히던 바위들이 어둠에 잠기고, 보랏빛 하늘에 별 하나 둥실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아, 순식간에 온통 별들이 날아다녔다. 나는 손전등을 끄고서 별빛에 의지해 협곡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자연의 마법에 취하고 싶은 자, 반드시 페트라에 가 보시길….
<글과 사진·박종인 / 조선일보 여행기자>
◎ 가는 길
▶인천~두바이 : 대한항공 주 2회(월·목) 운항(약 9시간 40분 소요)
두바이~암만 : 요르단 항공, 에미레이트 항공 매일 운항(약 3시간 소요)
 
 
* 페트라 *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 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 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페트라를 묘사하였듯이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대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 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 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하에 구축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나바티안 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들러가는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고 번창했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옛 기록에 나오고 있지만 소멸한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이 도시의 위치도 잊혀졌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이 웅장한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당시로는 최강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는 전설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 갔다고 하여, '무사와디' (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현대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죤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 졌다.
 
이곳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버린 곳이며,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두윈들이 염소떼를 한가히 몰고있는,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 페트라(Petra) : 셀라
 
페트라는 요르단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1호의 역사적 유적이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의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구약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고 있다.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으며, 사사기 1:36에서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로 언급된다.  '바위' 라 불리우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실리의 디오도루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는 나바테안들이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생명과 음식과 가재들을 이 도시에 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셀라와 이곳을 같은 장소로 본 사람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였으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다섯 왕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때 처형당한 미디안의 왕 레켐을 페트라의 왕과 동일인으로 보았다.
 
1950년대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에 적어도 기원전 7000년 경에 문명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났다. 당시에 농경 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에돔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기원전 1200년 사이의 역사적인 정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후 형성된 에돔 왕국은 셀라를 수도로 하고 있었으며, 이 에돔 왕국의 실체는 성경을 통하여 추정해 볼 뿐이다.
 
무엇보다도 페트라는 나바테안들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인해 그 명성을 얻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이다.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주후 106년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테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룩하였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고 이곳 이름을 '하드리안의 페트라' 라 불렀다. 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후기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트랜스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 도시로 자리하게 된다. 주후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되었고, 언제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주후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이곳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이곳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이다. 1812년 젊은 유럽 탐험가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그의 행로중 이곳에 엄청난 유적들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한 부르크하르트가 우여곡절 끝에 페트라를 찾아내었고, 그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 유럽인들은 비로소 페트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 연구소의 도미니칸 수도사가 발굴을 시작하면서 1896년에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다른이들에 의해 로마시대의 나바테안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은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이루어 졌고, 그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성 입구의 문을 비롯해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나바테안들은 불후의 문명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널리 사용되던 아람(Aramaic)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지금까지 약 4천점에 달하는 나바테안들의 문자 기록이 수집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어서 그들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은 거의 없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나바테안들이 문자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학, 사상과 종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고대 문명이 앉고 있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바테안들은 돌을 깎아 웅장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이곳 페트라에는 암벽을 깎아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암벽 도시의 유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의 경관은 아주 대단하다. 이곳에 나타나는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안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건축양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거칠고 투박한 석공의 손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의 문양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었고, 토기의 두께는 2㎜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해 '계란껍질 토기(egg-shell pottery)' 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 시크 : 하늘을 가릴 듯한 높은 암석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균열 부분을 따라 2km 정도를 걸어 들어간다. 이 암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크(Siq)' 라고 부른다. 이 시크를 따라가면서도 고대 수로가 벽면을 따라서 이어진다.
 
* 보고 : 페트라의 유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라고 부르는 건물을 손꼽을 수 있다. 전면에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서있는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출입구 좌우의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고, 2층에 장식된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여인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다.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보고]라는 이름이 생겼다.
 
* 수도원 : [수도원]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페트라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면의 폭이 50m, 높이가 45m에 이른다.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것은, 이 건물 내부 벽면에 십자가 몇 개가 새겨져 있는데서 유래했다. 나바테안들이 이 건물을 세웠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내부에 십자가를 새긴 것으로 미루어 서기 4세기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 건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페트라 건물들의 내부는 의외로 단조롭다. 돌을 파내 규모가 큰 직사각형 방들을 만들어놓았다. 건물의 내부 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벽화가 없다. 그러나 암석 자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색깔과 기하학적 또는 물결 무늬들이 방 전체를 휘감고 있어 어떤 궁중 벽화나 장식보다도 현란하고 황홀하다.
 
* 바로의 궁전 :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 로마 원형 극장 : 바위산 자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나바테안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우직한 추진력이 마음껏 발휘된 작품이다. 약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너비가 40m에 이르는 로마 원형 극장은 2세기 경의 유적으로, 33층의 계단식 의자가 모두 바위를 그대로 깎아 만들었다. 이 극장은 각종 예술 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하나의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여겨지며,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치룬 것으로 여겨진다.
 
* 희생 제물의 언덕 : 원형 극장 뒷편 언덕으로 나바테안들이 희생 제사를 드렸던 산당이다.
* 왕족 무덤 지역  
* 열주로 :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거리로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 두 사자 신전 : 험한 산허리에 위치한 이 신전은 출입구가 병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쪽 벽면에 사자 형상이 새겨져 있어 두 사자의 신전으로 불리운다.
 
관련 성경 : 민23:9, 민 24:21, 민 31:8, 수 18:19, 수 13:21, 삿 1:36, 대하25:11-12, 욥14:18, 욥18:4, 욥24:8, 욥28:9, 욥30:6, 욥39:28, 시18:2, 시27:5, 시 60:9, 시31:2, 시61:2, 시71:3, 시74:15, 시89:26, 시92:15, 시104:18, 시141:6, 렘 4:29, 렘 48:28, 렘49:16, 암 6:12, 욥 1:3-4, 나 1:6, 삿 1:36, 왕하 14:7, 왕하 14:7, 고후 11:32
 
▶ 아론의 산 (자발 하룬) : 호르산
가데스에서 광야로 들어간 출애굽 여정 38년간의 생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는다. 다만 출애굽 후 40년 5월 1일 에돔 국경 호르산에서 아론이 죽었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 호르산은 오늘날 페트라의 꼭대기에 있는 해발 1,593m의 자발 하룬(아론의 산)에 해당한다. 페트라 내의 박물관 아래에 있는 제벨 하비스의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페트라 꼭대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성경의 호르산으로 현지 지명으로는 '아론의 산' 이라는 의미의 '자발 하룬' 이라 불린다. 아론을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하룬으로 부른다. 산 꼭대기의 아론 무덤에는 비잔틴 시대에는 돔형의 건물과 오벨리스크가 있었으나 현재는 모스크 형태의 건물이 남아 있다.
 
관련 성경 : 민 20:22, 민 20:23, 민 20:25, 민 20:27, 민 21:3, 4, 민 33:37-39, 민 33:41, 민 34:7, 8, 신 1:44, 신 32:50
 
▶ 아인 무사 : 모세의 우물
'아인 무사'란 아랍어로 모세의 우물이란 의미이다. 세개의 하얀색 돔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에 들어가면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샘물을 볼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낸 곳
(민 20:11)이라 하나, 위치적으로 성서의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로 보기는 어렵다.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위를 쳐서 물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해소 시켰던 모세를 기념하기 좋은 장소이다.
 
▶ 타윌란(Tawilan) : 데만
페트라와 베이다 사이에 위치해 있는 데만은 창세기에는 에돔의 자손중 한 사람의 이름으로 등장하나 후에 에돔의 도시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욥기에 나타나는 친구 엘리바스는 바로 이 데만 출신이다. 성경에서 예레미야의 예언과 에스겔의 예언 가운데 드단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에돔의 수도의 한 후보지역이며 대도시의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36:11, 창36:15, 창36:34, 창36:42, 대상1:36, 대상1:45, 대상1:53, 욥2:11, 욥4:1, 욥15:1, 욥22:1, 욥42:7, 욥42:9, 렘49:7, 렘49:20, 겔25:13, 암1:12, 합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