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위기설 지났지만, 진짜 위기는 이제 시작
국민경제를 공포에 떨게 했던 9월 위기설
일주일 동안 우리경제를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던 ‘9월 위기설’이 잦아들었다. 9월 위기설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매입했던 채권 가운데 9월 10일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67억 달러 채권(한국은행 집계 기준)을 달러로 바꾸어 빠져나갈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최근 외환보유고 축소와 환율 급등, 무역수지 적자행진이 신빙성을 부여했고, 덕분에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은 심하게 출렁였다.
외환보유고가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2,400억 달러가 넘는 세계 6위의 외환보유국이며 GDP가 9,000억 달러인 한국경제가 고작 67억 달러 자금 유출로 위기에 빠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규모 세계 13위의 나라가 외국인 채권만기 도래 금액 67억 달러 때문에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에서 일대 혼란에 빠졌고, 정부에서는 연일 해명보도와 대응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분주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이 연출된 것일까?
최초의 9월 위기설 진원지는 다름 아닌 정부와 여당 자신들이었다. 확산되어가는 촛불집회를 잠재우고자 지난 6월, 경제위기설과 9월 위기설을 퍼트린 것이다. 이 와중에 원자재와 원유가 상승으로 경상수지 적자행진이 이어졌고, 월가의 금융위기가 닥치자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외국인들이 대량으로 한국주식을 팔아 달러로 바꾸어갔으며 그 결과 환율은 폭등하고 주가는 곤두박질쳐 1,500선마저 붕괴되었다.
9월 위기설의 주범은 외국 금융자본
올해 들어 이미 채권만기도래 예상금액 약 7조 원의 거의 4배에 달하는 26조 원의 주식을 외국인이 팔아치운 것이다. 달러 수요가 증가하고 환율이 치솟자 지난 7월 정부는 환율방어를 한다고 수십억 달러를 외환시장에 풀었다. 그러나 환율은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외환보유고를 낭비하는 결과만 초래하여 외환보유고는 두 달 동안 150억 달러가 줄어들어 8월 말 기준 243억 달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9월이 가까워지자, 불안한 금융상황을 이용해 차익을 얻으려는 외국인 투기세력이 대대적인 주식 공매도를 감행하여 금융불안을 최고도로 증폭시켰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주식을 빌려서 비싸게 판 뒤, 금융불안과 주가 폭락을 조장한다. 그리고 주가가 떨어지면 싸게 사서 빌린 주식을 다시 갚고 차익을 챙기는 ‘공매도(short stock selling)’가 외국인의 주도로 진행된 것이다.
최근 외국인 주식 매도분 26조 원 가운데 공매도가 24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의 발언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대량 공매도 거래가 진행된 직후, 9월 위기설 루머가 집중적으로 돌기 시작했고 금호, 두산, 하이닉스, LG전자 등 특정기업을 대상으로 한 공매도와 그에 이은 위기설 확산, 주가폭락 상황이 전개된 것도 이런 배경 아래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영국 일간 <더 타임즈>가 “골치아픈 원화로 인한 문제들이 쌓이면서 한국이 검은 9월로 향하고 있다”라는 제하의 9월 1일자 기사를 내보내 한껏 신빙성을 부여했다.
법치와 규율, 질서를 세울 곳은 바로 자본시장
그러나 투기자본이 공매도 했던 주식을 되사는 숏 커버링(short covering)이 시작되고, 9월 7일 미국 월가에서 정부후원 모기지 금융기관(GSE)인 패니매와 프레디맥에 대해 미국 역사상 사상 초유의 2천억 달러 구제 금융 결정이 내려지면서 미국 금융시장이 진정되자 9월 위기설은 잦아들었다. 투기적 외국자본이 조장한 9월 위기설을 그 자신들이 거둬가 버린 것이다.
요약하면 ‘67억 달러의 9월 만기도래 외국인 채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앞두고 ① 경상수지 적자와 외환보유고 축소, ② 외국인 주식 순매도 지속과 주가 하락, ③ 환율 상승과 원화가치 하락, ④ 정부의 9월 위기설 정치적 이용이 주변 환경을 조성해 주었으며, 결정적으로는 외국인 주도의 공매도가 주가폭락과 환율 급등을 조장했고, 외국 언론이 지원사격을 하면서 9월 첫 주를 외환위기의 공포 국면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번 사건은 적절한 규제가 준비되지 못한 채 자유화된 외환시장과 자본시장으로 인해, 투기적 외국 금융자본이 마음껏 우리 시장을 교란해서 투기적 이익을 취할 수 있을 만큼 우리 경제가 취약한 상태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어설프게 위기설을 퍼트려 정치적 국면 전환을 꾀한 이명박 정부도 철저히 농락당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이른바 법치와 규율, 질서를 세워야 할 곳은 노동시장이 아니라 바로 자본시장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진짜 경제위기는 이미 시작됐다
사실 우리경제의 진짜 문제는 9월 외환위기설이 아니다. 이보다 심각한 위기는 이미 실물경제에서 시작되었다. 물가가 지난해 2.5%의 두 배 이상인 5% 수준으로 치솟고 경제성장은 잠재 성장률 밑으로 빠르게 하락하여 하반기에는 3% 범위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한국경제의 위기 요인 가운데 국민생활과 생계를 위협할 중요한 요인을 몇 가지만 압축해보자.
첫째, 민간소비가 심각하게 위축되는 등 내수침체가 가속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수출 고공행진에 비해 내수는 늘 경제 성장률을 밑도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내수 부진 속에서 고전을 하며 버텨오던 중소기업과 자영업은 최근 가속화되고 있는 내수침체에 심각한 타격을 받아 한계상황에 직면했다. 지난해 4.5%에 달하던 내수 성장률은 올해 상반기에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2%에 불과했다. 상반기 경제성장률 5.3%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소비부진 → 내수 중소기업, 자영업 채산성 악화 → 해당 종사자 소득 감소 → 소비부진의 악순환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민간소비와 내수 부진은 ① 고용사정을 급격히 악화시켜 예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용창출력, ② 물가상승으로 인한 소비위축과 소비 여력 악화, ③ 특히 심화되어온 양극화로 인한 저소득층의 소비능력 약화로 장기화될 전망이다. 이는 내수에 기반하고 있는 자영업과 중소기업의 경영상황을 급격히 악화시키면서 내수기반 자체의 붕괴를 걱정해야 할 상황까지 이르렀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교육자율화 정책 파장으로 사교육비가 급증하여 올해 상반기에는 교육비 지출이 전년대비 9.1%가 늘어난 15조 3,000억 원을 넘어섰다.
둘째, 2008년 들어 월급은 물가 상승률 밑으로 떨어져 실질 임금 . 특히 자영업 일자리는 지난해에 비해 7만 개 이상 줄어들었증가는 사실상 마이너스 상태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임금근로자 뿐 아니라 비임금근로자인 자영업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는데, 이들이 점포를 폐업하면 아예 소득이 없어져 버리는 심각한 상황에 내몰리게 되어 저임금과는 또 다른 충격 요인이 될 것이다.
째, 그나마 수출 호조로 상반기를 버텨왔던 한국경제가 미국에 이은 유럽, 일본, 아시아의 급격한 경기 침체로 하반기 이후 수출둔화가 예상되면서 총체적인 내우외환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미국 발 경기 침체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인데 유로 지역은 지난 2분기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유로화 도입이후 처음으로 -0.2%를 기록하였고 일본 역시 5년 만에 처음으로 전년대비 -2.4%로 떨어졌다. 이미 반도체, 전자 자동차 수출이 둔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이는 더욱 가속될 전망이다. 최근 유가와 원자재 가격 하락 등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수출둔화는 경상수지 적자의 만회 기회를 점점 더 어렵게 할 가능성이 높고 외환 불안정성을 지속시킬 것이다.
국민들의 생활과 생계를 위협할 실물경제의 위기
넷째, 내수침체, 소득감소, 수출둔화 등 실물경제 악화와 함께 늘어나는 기업과 가계의 부채는 경제회복에 결정적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지난 2분기 가계부채는 가계신용을 포함하여 660조 원을 넘었는데 이는 외환위기 당시의 3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며 우리나라 GDP의 70%에 육박하는 규모다. 물론 그동안 경제규모가 커진 것도 감안해야 하며, 미국경제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미국의 가계부채 규모가 GDP의 99%인 것에 비하면 아직은 적은 금액이다.
그러나 최근 오르고 있는 금리와 줄어드는 가처분 소득을 감안하면 절대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지난해 8월 기준 금리가 0.25% 인상된 데 이어 올해 8월에 다시 0.25%가 인상되고, 최근 금융불안과 은행의 자금조달 금리가 높아지면서 기업대출금리와 가계 대출금리는 2005년을 저점으로 계속 상승추세에 있다. 소득은 줄어들고 있는데 이자부담이 늘어나면서 소비위축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중소기업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최근 저축은행의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 부실이 무려 14%를 치솟고 전국적으로 미분양 아파트가 15만 채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건설업체로부터 시작되어 원가폭등과 환율폭등 압박을 받고 있는 중소기업들의 채산성이 다시 자금압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감세와 부동산 경기 부양책은 상황을 호전시킬 가능성 보다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감세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가계부채와 국가 경상수지 적자에 이어 재정수지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으며, 부동산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DTI규제 등 대출규제를 푼다면 상황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극화 경제를 넘어서 공존의 경제를 모색해야
이처럼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9월 금융위기가 아니라 실물경제에서 이미 시작된 경제위기이다. 이는 다수 국민들의 생활과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외환위기를 경험한 지 11년 만에 다시 닥친 경기 침체와 국민생활고는 지금부터 향후 수년간 이어질 예정이다.
오늘의 경제위기는 근본적으로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화된 승자독식의 정글 자본주의, 투기가 난무하는 카지노 자본주의, 중산층을 해체시키는 양극화 자본주의에서 유래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시장지상주의였다. 이번 9월 위기설 와중에 요동친 한국 금융시장은 외국 금융자본의 시장 교란 행위가 한 국가의 정부조차도 얼마나 손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의 외환보유고를 동원하고 연기금마저 동원했지만 시장을 뒤흔드는 환율 폭등과 주가 폭락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를 무력화시킨 시장지상주의 하에서 국민들은 인위적인 신용창출로 부채를 늘려가며 소비를 촉진해야 했고, 거대 금융자본은 그로 인한 이익을 독식하며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결국 승자조차도 살아남을 수 없는 공멸의 경제가 바로 시장지상주의였다. 시장지상주의 전도사인 미국마저도 공멸의 위기 속에 국가에게 손을 내미는 상황이 지금의 모습이다. 지난 3월 베어스턴스의 파산을 피하기 위해 3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실행한 경우와 이번에 패니매와 프레디맥을 살리기 위해 2,000억 달러 구제금융을 실행한 경우가 그러하다. 버지니아대 다든경영스쿨의 로버트 브루너 학장은 “만일 우리가 순수한 시장경제 금융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한 대목은 이를 지적한 것이다.
위기의 시기는 동시에 구조전환의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말로 지난 10여년을 지속해온 시장만능주의 경제, 양극화 경제, 공멸의 경제를 넘어 공존이 가능한 경제로 구조전환을 시도할 적기다. 이를 위해서는 ① 모든 것을 시장에 위탁하는 경제에서 벗어나 국가와 시장의 기능을 공존시키고, ② 수출 대기업위주의 경제를 전환하여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영업이 공존할 수 있도록 중소기업과 자영업을 집중적으로 회복시키며, ③ 부익부 빈익빈이 극단화 되는 경제를 피하기 위해 중산층과 서민을 살리도록 고용 안정책과 재정정책에 역점을 두고, ④ 모든 공적 영역을 시장에 편입시키는 극단적인 민영화 정책을 중지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공존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국가와 시장 기능의 공존,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영업의 공존, 부유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의 공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공존이 가능한 경제로 전환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것이 우리헌법 119조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한다는 헌법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규제완화와 감세,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공존의 길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