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터어키 그리고 돌궐족
터키(Turkey)의 지배계급이었던 돌궐(突厥) 족 (Turk - 트루크 족)
<< 터키의 젊은 여인 >>
돌궐족 ( 突厥 -- 트루크족 -- Turk 족 ) 의 역사
돌궐족(突厥 - 트루크족 - Turk족) 은
현재는 러시아 땅인 바이칼 호수를 중심으로 떠돌이 생활이었던 유목생활을 하던 유목민족이었다.
돌궐 제국을 이룬 트루크 族은 흉노(훈) 族의 일파라고 말하기도 한다.
흉노(匈奴)라고 하면, 흉노족, 몽고족, 돌궐족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 된다.
552년 돌궐족의 족장이었던 토문(土門)이라는 사람이 주변의 여러부족들을 복속시키고 힘을 길러
이리 가한(伊利 可汗)의 이름으로 돌궐의 왕(王)이 되었다.
돌궐의 왕(王)은 선우(單于) 또는 가한(可汗)이라고 불리웠다.
돌궐 제국과 당시의 상황을 알수 있는 것은
몽골의 오르콘(Orkhon)강 유역에서 발견된 돌궐문자 ( 튀르크語 ) 로 기록을 남겨둔 비문(碑文)이다.
이 비문을 해석해 보면 돌궐(튀르크)족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스텝의 유목 민족으로서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에 나오는 내용인데
신라의 24대 임금인 진흥왕 ( 534년 ~ 576 년 )은 고구려와 돌궐이 10년간에 사활(死活)을 건
대전쟁(大戰爭)을 벌이는 동안 고구려의 남쪽 수비군이 돌궐과의 전투에 투입된 시기를 이용해
고구려의 남쪽 지방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역사 기록을 보면
552년 새롭게 돌궐의 국가를 건설하고 힘을 기른 돌궐은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지방을 내주었지만, 돌궐과의 전쟁에 전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581년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가 돌궐(突厥)을 침략하여 격파하였다.
이때 돌궐(突厥)은 서쪽으로 쫓겨 나가게 되었다.
583년 돌궐은 동족간의 다툼으로 동돌궐(몽골고원)과 서돌궐(중앙 아시아)으로 분열되었다.
<<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누어진 후의 돌궐제국의 영토 -- 583 년 >>
598년부터 614년 까지 수(隋)나라는 16년동안에 4차례에 걸쳐서 고구려를 대규모로 침공하지만
고구려는 4차례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었다.
결국 수(隋)나라를 패전의 후유증으로 618년 수(隋)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618년 수(隋)나라가 망하자 북쪽의 동돌궐(東突厥)이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했으나,
630년 당(唐)나라가 다시 동돌궐(東突厥)을 공격하여 동돌궐(東突厥)은 멸망하게 된다.
나라를 잃은 돌궐사람들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642년 과 661년 당(唐)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해왔으나 연개소문이 막았다.
당시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로 두 나라는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668년 당(唐)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고구려는 마침내 멸망하였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자 많은 고구려 유민(遺民)들은 몽골,글안,돌궐등의 다른 민족에게 의탁하여 살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의 몽고지역에 있었던 돌궐로 들어갔다.
682년 동돌궐이 울란바토르 ( 지금의 몽고 )에서 제2의 돌궐제국을 수립할때
고구려에서 온 유민(遺民)들이 돌궐 주민들의 절반 정도인 2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돌궐은 특히 고구려 유민(遺民) 가운데 여성을 뽑아 종교의 수장(首長)인 제사장에 임명했다.
이를 <탕구르> 라고 했는데, 고조선 시대 제사장의 수장(首長)을 <단군>이라고 한것과 비교하면
<탕구르>는 <단군>과 같은 계열의 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멸망( 668년 )의 여파는 매우 컸다.
동아시아의 여러 소수민족들을 다둑거리면서 지내던 고구려가 사라짐으로써
중국에서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부렀던 우리민족과 같은 계통의
여진족, 말갈족, 흉노족(훈족), 선비(鮮卑)족, 돌궐족, 쥬신족(조선족), 민주족, 거란족, 몽골족 등의
주변의 소수 민족들의 국가들도 모두 멸망하게 되는 길을 걷는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난 후 돌궐은 수많은 고구려 유민(遺民)들을 받아들인다.
670년경에는 강성해진 당(唐)나라가 주변의 약소국들을 침략하게 되었는데,
당(唐)나라와 위그르의 침략으로 돌궐민족이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682년 몽골초원에서 고구려 유민(遺民)들을 받아들여 힘을 기른 돌궐은
울란바토르 ( 지금의 몽고 )에서 동(東)동궐을 다시 건설하였다.
745년 같은 계통의 부족인 <위그르>의 공격을 받아 동(東)동궐은 멸망하였다.
중앙 아시아로 옮겨간 서(西)돌궐은
657년 당(唐) 나라의 공격으로 다시 서쪽으로 밀리면서 세력은 점점 약해져갔다.
당(唐) 나라의 玄宗임금이 돌궐의 제왕 퀼 테킨의 죽음을 애도하며 받쳤던 돌궐비문의 내용을 보면,
당(唐)이 돌궐과 협력을 하여야 존속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돌궐족은 나라를 세운 552년부터 나라가 멸망한 745년 까지 200 년간 중앙 아시아에서 셰력을 펼쳤으나
수차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주민들은 점점 서쪽으로,, 서쪽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들 주민들은 결국 지금의 터키 지역까지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1037년 터키에서 셀주크 왕국을 세운 돌궐족들은 크게 번성했다가
징기스칸의 몽고군에 지배를 받다가
1453년 돌궐족 출신의 <오스만>이라는 사람에 의해 오스만 터키 왕국을 건설하였다.
돌궐족 (투르크族)도 몽골을 근거로 突厥제국을 세웠을 때는 우리나라 사람과 비슷한 몽골인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당(唐)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이란, 아랍인들과 혼혈하여 서양사람을 더 닮은 지금의 터키 사람들이 되었다.
터키의 역사
395 년 ~ 1453 년 : 비잔티움 제국 ( 동로마 제국)
수도 : 콘스탄티노플(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 했음 --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 )
그리스도교(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1000 년간 유지된 제국이었음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략으로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하고 멸망하게 되었다.
참고 : 로마 제국
셀주크 제국 ( 1037 년 ~ 1299 년 )
중국 서북부지역에 있던 돌궐족들이 <셀주크>라는 족장을 따라 볼가강을 넘어 흑해 연안지역으로 왔다.
이들은 지금의 이란 북부지역에서 페르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여 이슬람 수니파로 개종하였다.
1037년 <셀주크>의 손자인 <차그니 베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였다.
1055년 바그다드를 정복하여 이슬람을 통일했고,
1063년에는 이란과 이라크(메소포타미아)지역을 총괄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1068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였다.
1071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대군을 섬멸하고 비잔티움 황제를 포로로 붙잡았다.
<< 셀주크 왕국의 영토 >>
1092년 <말리크 샤 1세>가 죽자 제국은 그의 형제와 네명의 아들들의 권력 투쟁으로 분할되었다.
1096년 셀주크 왕국의 분열을 틈타 서유럽에서 출발한 군중 십자군과 1차 십자군이 침공해 왔다.
십자군은 니케아, 안티오키아,예루살렘을 차례로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비록한 기독교 국가를 세웠다.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의 그리스도교(기독교)가 예루살렘을 확보한 기간은
1099년 ~ 1187년 & 1229년 ~ 1244년 사이이었다.
1147년 셀주크 왕국은 <아메드 산자>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서유럽에서온 제 2차 십자군 원정대의 침략(1147년~1148년)을 막아 낸다.
1153년 왕이었던 <아메드 산자>를 몰아내고 돌궐족 출신의 <오구즈>가 반란을 일으켜 왕(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셀주크 왕국은 더더욱 분열되면서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1174년 돌궐족 출신의 <살라딘>이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지역에서 힘을 길러
이 지역의 맹주가 되어 셀주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1187년 시리아, 이집트에서 독립왕국을 건설한 <살라딘>은
제 1차 십자군 원정으로 빼앗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1200년 돌궐족에 의해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셀주크 왕국은 주변에서 힘을 키운 맹주들이 독립하여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지역 ( 지금의 터키 지역 )만을 차지하고 있는 조그마한 나라가 되었다.
오스만 트루크 제국 ( 1299 년 ~ 1922 년 )
1299년 셀주크 왕국에서 힘을 기른 돌궐족 출신의 <오스만>이 왕국을 건설하였다.
1326년 <오스만>의 아들인 <오르한>이 왕위를 오르고
이웃한 동로마제국의 변방의 지역으로부터 점령하기 시작한다.
1453년 <메메드>왕은 동로마 제국을 점령하였다.
1512년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켰다.
1526년에는 헝가리의 땅 대부분을 점령한다.
1529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을 1개월 이상에 걸쳐 포위하였으나 점령에는 실패했다.
1538년에는 프레베자 해전에서는 스페인 함대를 물리치고 지중해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573년에는 사이프러스 섬을 점령했다.
1574년에는 아프리카 튀니스를 점령했다.
1804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처음으로 독립하여 나갔다.
1830년 그리스가 오스만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나갔다.
1881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가 독립하여 나갔다.
1908년에는 불가리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나갔고,
1912년에는 알바니아가 독립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맹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 으로 전쟁에 참가한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서 패배한 패전국으로 처리되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영토의 대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1922년 <메메드 6세>가 폐위됨으로써 돌궐족이 건설한 오스만 제국은 헤체되어 멸망하였다.
터키 공화국 ( 1923년 ~ )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패망했고,
1923년 <케말 아타튀르크>이 주도한 군사혁명으로 터키에는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지배 vs 피지배
중앙 아시아에서 출발하여 동유럽으로 이주한 돌궐족들은 비록 숫자적으로 적은 숫자였지만
(1) 발달된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2) 말을 타고 빨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빠른 Speed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지금의 소아시아 지역에서 지배계층으로 자리를 잡을수 있었던 것이다.
적은 숫자로 큰 집단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그만한 기술이 있으면 가능한 것이다.
10만 마리의 토끼를 10마리의 호랑이가 지배하고,,,,,
영국이 인도를 신민지로 지배할 당시 인도에 파견되어 있었던 영국인의 숫자는 얼마되지 않았다.
옛날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할 때 한국사람의 숫자와 비슷한 일본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총이 없는 한국인 10만명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총을 가진 일본인 100 여명이면 충분하였던 것이다.
또 중남미에 스페인 군대가 잉카나 마야의 후손인 아즈텍(Aztec)을 지배 하였을때
현지인들은 여러 수천만 이었는데 스페인 군대는 수천명에 불과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이 현지인이 가지고 있지 않는 발달된 기술이 있으면
비록 숫자는 적어도 간단하게 힘없는 현지인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숫자가 적어서 현지인들과의 인종적인 혼혈에서
자신들의 핏줄보다는 현지인들의 핏줄이 더많이 혼혈되어
지금은 순수한 의미에서는 같은 민족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지만
당시 터키를 지배한 돌궐족은
비록 소수의 집단이었지만 우리 민족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집단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사건 사고
2009년 7월에 발생한 우루무치(烏魯木齊) 유혈사태를 보면서 느낀점
2009년 7월 5일 중국 신장 위구르(新疆 維吾爾) 자치구의 수도인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중국으로 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위구르인들의 시위가 발생했는데,
중국 정부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80 여명의 사상자, 1,800 여명의 부상자, 그리고 600여채의 건물이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결국 시위는 유혈사태로 번지면서 군대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압되었다.
터키내에서도 30만명 가량 살고 있는 위구르족은 터키와 같은 계열의 민족이다.
시위가 진압되고 난 후 2009년 7월 11일
터키의 총리 ( 레제프 에르도안 ) 는 중국 정부가 위구르인에 대한 인종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또 터키의 주요 도시 ( 앙카라와 이스탄불 ) 에서는
이번 사태로 사망한 위구르족 사망자에 대한 추모 기도회가 열렸으며,
또 중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중국 국기를 불태워 버리는 국기 화형식을 거행했다.
비록 멀리 떨어져 다른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같은 계열의 민족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따뜻하게 감싸주는데,,,,,
우리나라 민족은 같은 계열의 민족 ( 미국의 원주민 인디언 )에게 어떤 관심을 보였는지 반성해야 한다.
몽골 초원에서 출발하여 발전한 민족들의 흥망
흉노(훈) : BC 250 년 ~ AD 349 년
155 년 : 몽골 고원의 북흉노(北匈奴)가 선비(鮮卑)에게 정복됨
316년 : 남흉노가 중국의 진(晉)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중부와 북부 지역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진(晉)나라가 멸망한 후의 중국에서는 오호 십육국 시대( 五胡 十六國 時代 : 316년 ~ 439년 )로 들어간다.
선비(鮮卑) :
87 년 : 선비(鮮卑)족이 흉노족을 침략하여 흉노족의 왕(선우)을 처단하였다.
93 년 : 선비(鮮卑)족이 흉노족을 침략하여 흉노족의 왕(선우)을 처단하였다.
155 년 : 몽골 고원의 북흉노(北匈奴)를 정복함
293 년 : 선비(鮮卑)의 모용부(慕容部)의 부족장이었던 <모용외>가 고구려(高句麗)를 공격
296 년 : 선비(鮮卑)의 <모용외>가 또다시 고구려(高句麗)를 공격
386 년 : 선비(鮮卑)의 <도무제(道武帝)>가 북위(北魏)를 건국함
439 년 : 북위(北魏)가 중국의 북쪽 지역을 통일하고 오호 십육국 (五胡 十六國) 시대를 끝내고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 : 439 년 ~ 589 년 )를 이끌어 간다.
581 년 : 양견(楊堅 : 수(隨)나라 文帝)가 북위(北魏 : 당시에는 북주(北周))를 멸망시키고 수(隨)나라를 건설.
돌궐 : 552년 ~ 774년
552 년 : 돌궐족의 족장이었던 토문(土門 - 이리 가한(伊利 可汗))이라는 사람이 돌궐의 왕(王)이 되었다.
745 년 : <위그르>의 공격을 받아 동(東)동궐은 멸망
위그르 : 744년 ~ 840년
744 년 : 지배를 받아오던 동(東)동궐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의 위그르 왕국을 세웠다.
813 년 : 위구르가 토번(티베트)을 토벌
840 년 : <키르기즈>가 위구르를 무너뜨리고 몽골계 사람들과 함께 몽골고원으로 진출
866 년 : 위구르의 주민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천산 위구르 왕국을 세웠다.
거란(契丹)족의 요(遼) 나라 : 907년 ~ 1125년
916 년 : <야율아보기(耶律阿保磯)>가 거란족을 통합
924 년 : 거란이 오르홍강 유역을 정복함
926 년 :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킴
947 년 : 거란이 중국식으로 국호(요-遼)를 바꾸었음
986 년 : 거란이 송(宋)을 공격
여진(女眞)족의 금(金) 나라 : 1105년 ~ 1234 년
1105 년 : 여진족 완언부의 아구다가 금(金)을 건국함
몽고(蒙古)족 징기스칸이 세운 원(元)나라 : 1271년 ~ 1368년 ~ 1635년
1206 년 : 테무진이 칭기스칸에 추대되고 몽골제국을 창건함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청(淸)나라 : 1616년 ~ 1912년
1616 년 : 누르하치가 후금(後金) 건국함.
1636 년 : 후금 국호를 청(淸)으로 바꿈.
터키의 역사책과 한국의 역사책의 비교
터키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책에서는
옛날 중앙 아시아에서 강성했을 때인 돌궐 시절에는 자신들의 영토 동쪽끝에는 고구려가 있었는데
고구려와는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책에 보면 돌궐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별로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옛날 역사서를 보면 고구려와 돌궐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즉 당시 돌궐은 중앙 아시아에 위치해 있었는데, 고구려의 영토가 중앙 아시아까지 라고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돌궐에서는 자신들이 만주 지방까지 진출한 적도 없다고 하고,,,
또 자신들의 영토 동쪽 끝에 고구려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 고구려 )에서는 자신들의 영토 서쪽 끝에 돌궐이 있었다는 소리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것을 내것이라고 하지 않고,,, 또는 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참 한심한 이야기가 아닐수 없다,,,,,,,, 이럴때 불러야하는 노래가 있다 ,,,,,,, << 아리랑 ( Arirang ) >>
옛날 고구려의 영토는 만주와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돌궐과 경계선을 마주하는 중앙 아시아까지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고구려와 전쟁도 하고 동맹관계도 유지하였던 돌궐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에 나오는 내용인데
신라의 24대 임금인 진흥왕 ( 534년 ~ 576 년 )은 고구려와 돌궐이 10년간에 사활(死活)을 건
대전쟁(大戰爭)을 벌이는 동안 고구려의 남쪽 수비군이 돌궐과의 전투에 투입된 시기를 이용해
고구려의 남쪽 지방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역사 기록을 보면
55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유목제국인 돌궐이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지방을 내주었지만, 돌궐과의 전쟁에 전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581년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가 돌궐(突厥)을 침략하여 격파하였다.
이때 돌궐(突厥)은 서쪽으로 쫓겨 나가게 되었다.
589년에는 중국의 남쪽에 있던 진(陳)나라를 침략하여 멸망시켜 버리고 강성해진 수(隋)나라는
598년부터 614년 까지 16년동안에 4차례에 걸쳐서 고구려를 대규모로 침공하지만
고구려는 4차례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었다.
결국 수(隋)나라를 패전의 후유증으로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 618년 수(隋)나라 멸망
618년 수(隋)나라가 망하자 북쪽의 돌궐(突厥)이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642년 당(唐)나라 가 고구려를 침략해왔으나 연개소문이 막았다.
또 661년에도 당(唐)나라 가 고구려를 침략해왔으나 연개소문이 막았다.
당시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로 두 나라는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668년 당(唐)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고구려는 마침내 멸망하였다.
고구려 멸망의 여파는 매우 컸다.
동아시아의 여러 소수민족들을 다둑거리면서 지내던 고구려가 사라짐으로써
중국에서 동이족이라고 부렀던 우리민족과 같은 계통의
여진족, 말갈족, 흉노족(훈족), 선비(鮮卑)족, 돌궐족, 쥬신족(조선족), 민주족, 거란족, 몽골족 등의
주변의 소수 민족들의 국가들도 모두 멸망하게 되는 길을 걷는다.
고구려 멸망 후 당(唐)나라의 침략으로 돌궐도 망했으며 서쪽으로 옮겨 서돌궐을 건국하게 된다.
서돌궐이 훗날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고... 그리고 터키가 된다.
6,25 전쟁때
6.25 전쟁때 유엔 회원국들이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남한을 도와 북한과 싸웠는데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나라가 터키였다.
터키는 약 15,000명의 순수 지원 군인들을 파병했는데
그중에서 3,500명이 사망 할 정도로 그들은 열심히 싸워 주었던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대회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가 경기가 있는 경기마다 한국인들의 열열한 응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응원의 절정은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이었다.
한국에서 열리는 경기에서 한국만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터키도 같이 응원하였던 것이다.
이 장면을 지켜본 많은 나라에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였겠지만
터키와 한국은 서로 형제임을 확인하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특히 터키에서는 자신들이 준비하지도 않은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고,,,,
터키를 응원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TV로 중계되는 경기를 지켜보면서
피는 역시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심감했던 것이다.
또 터키의 승리 후에도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경기장을 돌았을 때는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임을 만천하에 알렸던 것이다.
터키 / 헝거리 / 한국의 언어
터키와 헝거리의 말과 한국말에는 비슷한 단어(말)들이 아주 많다고 한다.
같은 우랄 알타이어 계통이다.
터키 / 헝거리 / 한국 사람들의 공통점
음식문화가 비슷하고,,,,
국민들의 정서가 비슷하다
모두 주위의 다른 민족보다는 우월하다는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고,,,,,,
다혈질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주 반대로 다정다감하면서 인정이 많고,,,,,
노는 것도 시시하게 노는 것 보다는 한판 크게 노는 것을 좋아하고,,,,,,
성질도 아주 급하다.
그리고 이들 3 나라 ( 터키 + 헝거리 + 한국 ) 사람들은 모두 몽고 반점을 가지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몽고 반점이 없다.
유럽에서는 이들 2 나라 ( 터키 + 헝거리 )사람들만 몽고 반점을 가지고 있다.
http://www.lasvegaskim.com/Etc_Poem_7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