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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불가사의란
세계 7대 불가사의란 여러 관찰자가 기록한 고대 지중해와 중동 지방의 탁월한 건축과 조각을 말합니다.
이 관찰자로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BC 2세기의 작가인 시돈의 안티파테르와 그보다 약간 후대의 인물로서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비잔티움의 수학자 필론이라고 불리는 BC 2세기의 인물입니다.
세계7대 불가사의를 검색하면 21개가 나오는 것은 고대의 7대불가사의가 피라미드만 남고 모두 없어져서 현대의 7대불가사의를 선정하기 위하여 21개로 줄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 고대 7대 불가사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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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2.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Pharos) 등대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먼 본토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c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3㎞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으며 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 정도 떨어져 있는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B.C28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등대에 불을 지폈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3.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 정원(Hanging Garden)
BC 500년경 신(新)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다.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있다는 뜻이다.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露臺)에, 성토하여 풀과 꽃, 수목을 심어놓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한다.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물을 댔다고 전해진다.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왕비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서 공중 정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 왕국의 키약사레스 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하여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기로 결심했다.왕의 명령을 받은 재주가 뛰어난 건축가, 기술자, 미장이들은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각각 400m, 높이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에 불과했지만 총 높이가 105m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었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 꽃이랑 덩굴초랑 과일 나무를 많이 심도록 한 이 파라미드형의 정원은 마치 아름다운 녹색의 깔개를 걸어놓은 듯이 보였다.그런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는 방을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공중 정원에 대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의 페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있다. 에페수스 시는 소아시아에 있는 고대 이오니아 지방의 열두 개 도시 중 하나로서 B.C 6세기 경에 이미 서아시에서 상업의 요충지로 번영하여 가중 부유한 도시로 알려졌다. 이 곳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아르테미스 신전이다.이 신전은 당시 최고 부자였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B.C 560∼B.C 546)때 세우기 시작하였다. 높이 20미터 정도의 훌륭한 이오니아풍의 백색 대리석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이 신전은 완성되기 까지 120년이 걸렸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하여 이 신전을 돌아보고는, 기자에 있는 피리미드에도 떨어지지 않는 걸작으로 묘사하면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한 지 1세기 정도 지난 뒤 그 훌륭하고 아름다운 신전은 어리석은 한 인간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B.C 356. 10월 "어차피 나쁜 일을 하려면 후세에까지 알려질 수 있는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한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가 신전을 계획적으로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 후 디노크라테스가 불타 버린 신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에페수스의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을 팔았고, 왕들은 크로이소스 왕을 본받아 기둥을 기증하기도 했다. 더욱이 아시아 원정 길에 올랐던 알렉산더 대왕은 한층 완성중에 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의 장대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았겨 "만일 에페수스인이 이 신전을 나의 이름으로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내가 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페수스인들은 다른 나라의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야심이 강한 에페수스인들은 자신들의 신전을 지금까지 어떤 신전보다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여, 그 당시 가장 훌륭했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파르테논은 길이가 69m. 폭이 30m, 높이 10정도로서, 대리석 기둥을 58개나 사용한 신전이었다. 에페수스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정도의 규모로 만들기 시작했다. 높이 18m짜리 기둥을 127개나 사용했고, 길이는 120m, 폭은 60m로 했다. 또한 신전의 건축용 자재는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중앙의 넓은 홀에는 네 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그 규모나 화려함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처음에는 땅의 신 크로노스와 여신 헤라를 숭배했지만 뒤에 제우스 신을 숭배하게 되어서 B.C457년에 제우스 신전을 만들었고 그 안에 '피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을 안치하였다.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네 여신상은 피디아스의 2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피디아스는 8년여의 작업 끝에 제우스 상을 완성했는데, 그는 제우스의 신성함 위엄과 함께 너그러움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걸작 중의 걸작 제우스 상은 오늘날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대지 위에 우뚝 세워진 신전에는 양옆에 열세 개씩, 양끝에 여섯 개씩 장엄하고 무거운 도리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완만하게 기울어진 지붕이 덮여 있다. 이 신전의 한가운데 있는 제우스 상은 높이가 90㎝, 폭이 6.6m인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2m 정도 되는 상은 거의 천장을 닿고 있다.제우스 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그 위에 보석과 흑단, 상아를 박아 장식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금으로 된 발 디딤대에 올려져 있는 양다리는 거의 예배자의 눈높이와 일치하였다. 오른손에는 금과 상아로 만든 승리의 여신(Nike)상을 떠받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황금을 박아 장식한 지팡이(왕홀)를 쥐고 있다. 지팡이 위에는 매가 앉아 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어깨에는 꽃과 동물이 새겨진 황금의 아름다운 망토가 걸쳐져 있다. 제우스 신전의 발굴 움직임이 18세기 경부터 일어났고 처음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829년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년경에 독일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1950년대 제우스 신전 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6.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의 마우솔러스 영묘(靈廟) - Mausoleum
거상(巨像). 그리스어 콜로소스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 등을 보고나서 칭한 말이 그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에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로도스섬의 콜로서스이다.로도스 항구에 서 있던 태양신 <헬리오스 청동상>은 높이가 36 m나 되었으며, 린도스(로도스 섬 동쪽에 있던 고대 도시의 이름)의 카리오스에 의해 BC 280년경 건조되었는데 BC 224년의 지진 때 붕괴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현존하는 것도 많으나 모두 기념비적인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피라미드만 현존함에 따라 새롭게 7대 불가사의를 지정하였습니다.
**현대의 7대 불가사의
1.이스터 섬의 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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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
이스터 섬은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조그마한 화산섬으로 넓이가 약 166㎢이고, 칠레(1888년 이후 칠레의 영토가 됨) 앞바다 3800㎞에 위치하고 있다.
남위 27도, 서경 109분에 있고, 아열대의 온화한 기후의 섬이다.
'이스터 섬'의 이름은 이 섬의 발견자인 네덜란드 제독 로헤벤이 1722년 4월 5일, 즉 이스터(부활절) 날에 발견한 것에서 유래한다. 섬사람들은 이스터 섬을 '라파누이(큰섬)' 또는 '테피트오테헤누아(세계의 배꼽)'라고 부르고 있다.
이 조그마한 섬에 유명하게 된 이유는 '모아이(Moai)'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상들이 여기저기 서 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석상들은 다리가 없고 몸통만 있는 위풍당당하면서도 거북스러운 모습에 머리는 어울리지않게 크고 턱은 힘차게 앞으로 뻗고 귀는 괴상할 정도로 길다.
지금까지 이런 거대한 석상들이 약 1000개 가량 발견되었는데 키가 3.5-4.5m에 달하고 무게가 20t쯤 되는 것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무게가 90t이고 키는 10m나 된다.
대부분 서기 400∼1680년 사이에 만들어졌고 11세기경 가장 많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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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
1722년 처음으로 이곳을 발견한 네덜란드 제독 야코프 로헤벤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섬에 키가 10m가 넘는 거대한 군인들이 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놀랐다.
제독은 침착하게 배를 섬에 접근 시켜 거대한 군인들이 단순한 석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제독이 상륙한 다음날 여러 가지 색을 몸에 칠한 원주민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보통 키에 붉은 머리의 백인이었다.
1968년 스위스인 다니켄은 주민들과 밀접한 대화를 나눈 결과 이스터 섬에 있는 거석들의 진상을 알아냈다고 발표했다. 그의 말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외계의 지적 생물체가 거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니켄은 원주민들이 돌로 된 연장만으로 조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석의 질이 단단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더욱이 거석의 규모가 너무 크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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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
원주민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거석을 옮기기 위해 사용했을 통나무를 만들 숲이 주위에 없었다. 이스터 섬의 천연적인 환경은 이런 거석들을 만들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다니켄의 책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비슷한 류의 책들이 수 없이 발간됐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외계인의 작품이라는 모아이를 보기 위해 이스터 섬을 방문했다. 초호화 유람선의 일정에 이스터 섬이 단골메뉴로 포함됐다.
그러나 이스터섬을 체계적으로 연구 한 학자들은 외계인이 모아이를 만들었다는 설명은 한마디로 책을 팔기 위한 장사속이라고 일축했다. 모아이는 신비에 가득찬 유물이 아니라 이스터섬 주민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2.하기아 소피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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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이스탄불(현재 터키의 수도이며 이슬람이 많은도시라는 뜻)이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조되었다.
비잔틴 문화의 최고 건축물로써 아야 소피아(Aya Sophia)라는 현지어로 불리며 현재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현재의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532~537년)으로 세계의 교회 중 4번째(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로 크며,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됐다.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의 작은 교회로 지어졌으나, 404년 알카디우스 황제 때 화재로 무너졌으며 그 후 데오도시우스 2세 때 두 번째 성 소피아 대성당이 완공(415년)되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니카의 반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니카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비인 데오도라(이집트 출신의 댄서) 때문에 생긴 반란이었다.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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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
그러나 그녀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과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도의 단성론(콘스탄티노플에서는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하느님 자신이라는 양성론을 채택했다)을 믿는다는 것을 빌미로 히포드롬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 반란군의 기세에 눌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난을 피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려 했으나 그를 데오도라가 저지했다.
다음 순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히포드롬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단숨에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제2차 소피아 성당이 파괴되었으며, 그 잔해 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황제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에 걸맞는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수학자 이시도르를 투입하였다.
건축을 시작한 후 5년 10개월 만인537년에 소피아 성당은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3.스톤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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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환상열석(環狀列石)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조물의 하나인 스톤헨지(StoneHenge)는 영국 남부 솔즈베리 평야(Salisbury Plain)에 위치하며, 고대 영어로 '공중에 걸쳐 있는 돌'이라는 의미이다.
5천년전 이 곳엔 초기 석기시대 사람들이 정착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별 흔적을 남기진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적들은 청동기인들의 업적이다.
스톤헨지의 건조가 착수된 것은 기원전 2800년경이며,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로 완성된 것은 기원전 156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톤헨지는 원형(圓形)의 유적으로 각각의 거석들은 모두 한 중심점을 향해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바깥 도랑과 둑, 네모꼴 광장과 방향표시석인 힐스톤, 돌기둥을 세워 놓은 입석군(立石群), 중앙 석조물 등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2100년경 스톤헨지로부터 자그마치 385km나 떨어진 웨일즈 남서부의 프레슬리산에서 청석(blue stone)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져 왔는데, 최고 5톤까지 나가는 이 돌들을 옮기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썰매나 뗏목을 이용해 육로와 해상을 번갈아 가며 운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스톤헨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향표시석 힐스톤은 동쪽을 가리키는데, 그것도 하지(夏至)에 해가 뜨는 방향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하지날 힐스톤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해가 떠올라 중앙제단을 비췄던 시기는 천문학적으로 BC 1840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힐스톤을 세운 시기를 과학적으로 측정한 연대와도 맞아 떨어져 기묘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건축자들이 상당한 천문학적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래서 파종과 수확의 시기를 완전히 파악하고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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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
환상열석 중심축에서 30m를 벗어난 자리에는「사르센 원」이라고 불리는 둥근 띠가 있다.
사르센 원을 따라 가면 두개의 커다란 돌을 세워 놓고 그 위에 또 다른 돌을 눕혀 놓은 삼석탑(三石塔)을 만난다.
돌 한개의 무게는 25t에서 최고 50t까지 나간다. 기중기와 같은 기구가 없던 당시에 50t 무게의 돌을 어떻게 운반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히 남는다.
학자들은 지레 받침대와 밧줄을 이용해 돌을 움직였을 것이라고 과학적인 추측을 할 뿐이다.
4.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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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으로써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춘추시대 제(齊)가 영토방위를 위햐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통일(BC 221) 후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허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근년에 이 장성의 동부 유지(遺址)가 둥베이지구에서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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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흉노로부터 지키려고 장성을 란저우(蘭州) 북방에서 서쪽으로 둔황(敦煌) 서편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방민족의 활동으로 장성 위치는 남하하여, 6세기 중엽 북제(北齊)는 다퉁(大同) 북서에서 쥐융관(居庸關)을 거쳐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을 축성하였다.
수(隋)는 돌궐·거란 방비를 위하여 오르도스(내몽골자치구의 중남부) 남쪽에 장성을 쌓았다.
당대(唐代)에 들어서 북쪽까지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고,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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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明)나라시대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관광 대상이 되고 있는 바다링〔八達嶺〕 근처의 장성은 높이 8.5m, 두께는 밑부분 6.5m, 윗부분 5.7m이며, 위에는 높이 1.7m의 연속된 철자형(凸字形) 담인 성가퀴(城堞)를 만들고 총안(銃眼)을 냈고, 120m 간격으로 돈대(墩臺)를 만들어 군사의 주둔과 감시에 이용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본토와 만주·몽골 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5.콜로세움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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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을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80년) 때 완공하였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거대한 바위 축대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 도록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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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188 m, 최소 지름 156 m, 둘레 527 m, 높이 57 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1층은 토스카나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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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이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 및 천막 지붕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등도 벌였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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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데 재료로 쓰이기도 해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다가 18세기 경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6.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Pyramid)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와력(瓦礫)의 산으로 변한 것과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위의 사진에서는 가장 뒤에 있는 것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가운데에 있는 피라미드가 가장 커 보이는데, 이것은 원래 높은 땅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왼쪽 사진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큰 피라미드가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 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건조법] 피라미드를 건조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核材)·내장재·전재(塡材)·외장재의 순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아졌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진다. 정상까지 다 쌓고나면 위에서부터 외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외장은 정성들여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 장 끼워지지 않은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된다.
7.피사의 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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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피사 대성당(Duomo di Pisa)의 부속건물(대성당, 세례당, 종탑)중 3번째이며 마지막 구조물로써, 중세 도시국가 피사가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 함대에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세워진 종탑이다.
흰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꼭대기 종루를 포함해 8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는 55.8m, 무게는 14,500t 이나 된다.
탑내부는 나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을 통해 종루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종루에는 각각 다른 음계를 가진 7개의 종이 걸려있다.
1174년에 착공된 피사의 사탑은 이탈리아 천재건축가 보라노 피사논의 설계도에따라 탑을 만들어가던 중, 3층까지 쌓아올렸을 때 공사관계자들은 지반 한쪽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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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기술자였던 보나노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게 되었다.
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몇 번씩 공사를 중단했으나 결국 1350년에 맨 꼭대기층이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물론 건축당시부터 의도적으로 기울어진 탑을 세운것은 아니다.
1년에 1mm정도 기울어지는 미세한 자연 현상이 누적되다보니 오늘날과 같이 탑의 꼭대기가 수직선에서 무려 5m나 기울어졌다.
현재는 탑의 기울기가 멈춘 상태다. 최근 영국 런던대학의 토질 기계학과 존 부를랜드 교수는 "피사의 사탑은 이제 기우는 것은 멈췄다. 이는 지난 7세기만에 이룩한 개가"라고 말했다.
사탑이 이처럼 위태로운 상태에서도 수천년 동안 용케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세계7대 불가사의에 대하여 복사하지 않고 이 많은 양을 직접 쓸 수 있는 사람을 �아보세요.
출처: 네이버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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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각형 토대에 측면은 3각형을 이루도록 돌이나 벽돌을 쌓아올려 한 정점에서 만나도록 축조한 기념비적 구조물로 여러 시대에 걸쳐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서아시아·그리스·키프로스·이탈리아·인도·타이·멕시코·남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의 몇몇 섬에 지어졌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기 원
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터바에서 발전된 것으로, 제18왕조 초에 왕묘가 암굴묘(岩窟)의 형식을 취할 때까지 계속된다. 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의 피라미드 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 변이 63m인 직사각형 석조 마스터바로, 중앙에 깊이 28m의 수혈(竪穴)을 파고 그 밑에 매장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확장공사가 시작되어, 결국 마스터바를 6단 포개놓은 모양의 밑변 109×126m, 높 이 62m의 계단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헬리오플리스를 중심으로 예로부터 존재했던 태양신 숭배가 피안(彼岸)의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계단은 죽은 국왕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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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그 자체는 왕의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음식물과 가지각색의 물품을 진열하여 제사를 지내는 장소도 필요했다.
그래서 피라미드 북측에 장제전(葬祭殿)이 건조되고, 다시 동쪽에 세드제의 의식을 행하는 신전·소신전·중정이 남쪽에는 계단이 있는 대중정이 축조되었다.
그것들을 높이 10m, 동서 277m, 남북 545m의 사각형의 주벽으로 돌러 장대한 묘소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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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카프레 왕의 것으로 136미터, 세번째가 멘카우레왕의 것으로 62미터에 달한다.
왼쪽 사진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이고 아래 사진에서는 가장 뒤의 것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가운데에 있는 피라미드가 가장 커 보이는데, 이것은 원래 높은 땅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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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라미드는 입구와 조그만내실을 제외하면 모두 석회석으로 이루어 졌는데 돌의 크기의높이 1미터 폭 2미터 길이는 각각 다르다.
평균 2.5톤의 이 돌을 밑변에서 꼭대기 까지는 210단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230만 개 (또는 250만 개)의 돌이 필요하였다.
가령 이런 돌로 돌집을 쌓으면 1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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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들의 무게를 합치면 684만 8,000톤으로 만약 적재량 7톤짜리 화물로 운반하면 97만 8,286량의 화물차가 필요한데 이 화물차들을 연결해보면 그 길이는 6,200킬로미터에 이른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사업은 돌을 캐네어 뗏목으로 운반하고 공사를 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고 피라미드의 지하공사를 하는데만 적어도 10만명의 노예가 석 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게 쌓아 올리는데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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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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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지하로 가는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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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지하의 방
지하 30m, 피라미드의 정점 거의 바로 아래에 있다. 지하의 방 바로 앞에는 움푹패인 직사각형의 방이 있는데 용도는 분명하지 않다.
d. 하강통로
높이 1.2m, 폭1m 의 좁은 통로로 어른은 서서 걸을수 없을정도다. 기울기는26° 16' 이고 약 97m 정도 내려가면 수평해지고, 밑으로 9.7m 더 내려가면 지하의 방 에 도달한다.
e. 상승통로
기울기는 하강 통로와 같은26° 16' 이고, 넓이도 거의 같다. 길이는 약 40m, 이고 입구는 무게 5톤의 3개의 화강암으로 막혀있다.
f. 여왕의 방
안쪽 길이는5.74m, 폭5.23m, 높이6.22m 의 합각머리 모양 천장을 가졌다. 여왕의 묘실은 아니다.
여왕의 방에는 통기 구멍이 있기는 하지만 밖으로 끝까지 관통하지는 않고 중간에 끈겨있다.
g. 통기구멍
왕의 방에는 두 개의 환기창 구멍이 나있다. 통기 구멍의 용도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다.
어떤학자는 특정한 별자리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근거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다.
그리고 이 통기구멍에서는 가로, 세로, 두께가 각각 1피트, 4인치, 1/8인치인 철제판이 발견되었다.
이집트 에서는 대 피라미드 건설 당시에 아니면 , 그시기에 이미 철이사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대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철판을 분석한 결과 그것은 채광되어 정련된 철이지 운석등에서 얻은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 철판 성분에는 인위적으로 주석을 매우 적게 함유했다고 하고, 그 철은 1,000도 이상에서 녹았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철을 구하기가 어려웠을뿐 철의 사용법과 정련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h. 대회랑
대회랑은 높이8.5m, 아래쪽 폭은2.28m 이고, 좌우 각각 7개의 잘 다듬어진 석재가 위로 겹겹이 쌓여있다.
벽은 위에놓인 석재가 아래보다 7Cm 씩 안쪽으로 돌출되도록 하여 전체적으로 초엽 구조를 이루고 천장의 폭은 1.04m 이다.
회랑은26°16' 경사, 평행사변형을 유지하면서 위를 향해46m 이다.
그리고 밑에서 위로 갈수록 폭은 조금씩 좁아진다.
대회랑은 피라미드 전체높이의1/3위치에 있으며, 건축물의 상부2/3의 하중을 지탱하고 균열없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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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왕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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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가 밑면의 대각선 길이의 절반으로 설계 된 직육면체이다.
이 방은 지상에서 50m 지점에 위치한다.
바닥은 열 다섯 장의 두꺼운 화강암판이 깔려 있고, 벽은 10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벽에는 70톤의 화강암이, 천장에는 50톤 무게의 화강암 아홉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의 한쪽 구석의 천장에는 균열이 나있고, 균열에는 몰타르가 발라져 있다.
이 균열은 피라미드가 완성되기 전에 이미 나있었으며, 방의 구조상 받게 되는 뒤틀림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이 뒤틀림은 건설 당시에 생겼으며, 그 균열의 정도는 더 이상의 진행은 없다.
그리고 방 안의 어디에도 문자나 그림 같은 건 없다.
g. 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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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발견당시에 뚜껑은 없었다. 시신과 부장품도 없었다.
석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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