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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불가사의란

별을 그리다 2007. 7. 9. 10:12

세계 7대 불가사의란 여러 관찰자가 기록한 고대 지중해와 중동 지방의 탁월한 건축과 조각을 말합니다.

 

이 관찰자로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BC 2세기의 작가인 시돈의 안티파테르와 그보다 약간 후대의 인물로서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비잔티움의 수학자 필론이라고 불리는 BC 2세기의 인물입니다.

 

세계7대 불가사의를 검색하면 21개가 나오는 것은 고대의 7대불가사의가 피라미드만 남고 모두 없어져서 현대의 7대불가사의를 선정하기 위하여 21개로 줄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1.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2.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Pharos) 등대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된 등대의 높이가 135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졌다.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각 층은 모두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지어졌다(기울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음). 등대 안쪽에는 나선형의 길이 있어서 등대 꼭대기의 옥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아마도 알렉산드 대왕이나 태양신 헬리오스의 모양을 본떴을 것으로 여기지고 있다.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먼 본토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c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3㎞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으며 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 정도 떨어져 있는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B.C28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등대에 불을 지폈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3.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 정원(Hanging Garden)

BC 500년경 신(新)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다.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있다는 뜻이다.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露臺)에, 성토하여 풀과 꽃, 수목을 심어놓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한다.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물을 댔다고 전해진다.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왕비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서 공중 정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 왕국의 키약사레스 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하여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기로 결심했다.왕의 명령을 받은 재주가 뛰어난 건축가, 기술자, 미장이들은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각각 400m, 높이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에 불과했지만 총 높이가 105m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었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 꽃이랑 덩굴초랑 과일 나무를 많이 심도록 한 이 파라미드형의 정원은 마치 아름다운 녹색의 깔개를 걸어놓은 듯이 보였다.그런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는 방을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공중 정원에 대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의 페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있다.

4. 에페수스(Ephesus)의 Artemis 신전

에페수스 시는 소아시아에 있는 고대 이오니아 지방의 열두 개 도시 중 하나로서 B.C 6세기 경에 이미 서아시에서 상업의 요충지로 번영하여 가중 부유한 도시로 알려졌다. 이 곳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아르테미스 신전이다.이 신전은 당시 최고 부자였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B.C 560∼B.C 546)때 세우기 시작하였다. 높이 20미터 정도의 훌륭한 이오니아풍의 백색 대리석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이 신전은 완성되기 까지 120년이 걸렸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하여 이 신전을 돌아보고는, 기자에 있는 피리미드에도 떨어지지 않는 걸작으로 묘사하면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한 지 1세기 정도 지난 뒤 그 훌륭하고 아름다운 신전은 어리석은 한 인간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B.C 356. 10월 "어차피 나쁜 일을 하려면 후세에까지 알려질 수 있는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한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가 신전을 계획적으로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 후 디노크라테스가 불타 버린 신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에페수스의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을 팔았고, 왕들은 크로이소스 왕을 본받아 기둥을 기증하기도 했다. 더욱이 아시아 원정 길에 올랐던 알렉산더 대왕은 한층 완성중에 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의 장대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았겨 "만일 에페수스인이 이 신전을 나의 이름으로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내가 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페수스인들은 다른 나라의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야심이 강한 에페수스인들은 자신들의 신전을 지금까지 어떤 신전보다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여, 그 당시 가장 훌륭했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파르테논은 길이가 69m. 폭이 30m, 높이 10정도로서, 대리석 기둥을 58개나 사용한 신전이었다. 에페수스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정도의 규모로 만들기 시작했다. 높이 18m짜리 기둥을 127개나 사용했고, 길이는 120m, 폭은 60m로 했다. 또한 신전의 건축용 자재는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중앙의 넓은 홀에는 네 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그 규모나 화려함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5. 올림피아의 제우스(Zeus) 신상(神像)



제우스 상이 있는 올림피아는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 앨리스 지방에 있는 제우스의 신역으로서 완만한 구릉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로 예부터 잘 알려져 있다.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를 믿었다. 제우스는 고대 로마의 최고의 신 '주피터'와 같이 고대 그리스 신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천둥, 번개와 비바람을 만드는 신이며, 그의 주 무기는 벼락이었다. 제우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이며,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도시마다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고대 그리스에는 아테네, 스파르타, 앨리스 등의 도시 국가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처음에는 땅의 신 크로노스와 여신 헤라를 숭배했지만 뒤에 제우스 신을 숭배하게 되어서 B.C457년에 제우스 신전을 만들었고 그 안에 '피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을 안치하였다.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네 여신상은 피디아스의 2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피디아스는 8년여의 작업 끝에 제우스 상을 완성했는데, 그는 제우스의 신성함 위엄과 함께 너그러움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걸작 중의 걸작 제우스 상은 오늘날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대지 위에 우뚝 세워진 신전에는 양옆에 열세 개씩, 양끝에 여섯 개씩 장엄하고 무거운 도리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완만하게 기울어진 지붕이 덮여 있다. 이 신전의 한가운데 있는 제우스 상은 높이가 90㎝, 폭이 6.6m인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2m 정도 되는 상은 거의 천장을 닿고 있다.제우스 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그 위에 보석과 흑단, 상아를 박아 장식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금으로 된 발 디딤대에 올려져 있는 양다리는 거의 예배자의 눈높이와 일치하였다. 오른손에는 금과 상아로 만든 승리의 여신(Nike)상을 떠받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황금을 박아 장식한 지팡이(왕홀)를 쥐고 있다. 지팡이 위에는 매가 앉아 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어깨에는 꽃과 동물이 새겨진 황금의 아름다운 망토가 걸쳐져 있다.

제우스 신전의 발굴 움직임이 18세기 경부터 일어났고 처음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829년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년경에 독일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1950년대 제우스 신전 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6.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의 마우솔러스 영묘(靈廟) - Mausoleum



페르시아 제국 카리아의 총독 마우솔로스를 위하여 그리스의 할리카르나소스에 건조된 장려한 무덤기념물이다.면적 29×35.6 m, 높이 50 m. 할리카르나소스의 묘묘(墓廟)라고도 한다. 마우솔로스의 생전에 착공되었으나, 그가 죽은 뒤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계속 진행하였으나 완성된 시기는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죽은(BC 350) 뒤로 추측된다.설계는 사티로스와 피테오스가 하였다. 동서남북의 장식조각은 각각 스코파스, 레오카레스, 티모테오스, 브리아크시스가 담당하였다.각 면의 조각·프리즈는 발굴되어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또, 로마인은 비슷한 대규모의 분묘건축(墳墓建築)도 마우솔레움이라고 일컬었다. 마우솔레움은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다.

7. Rhodes항구의 크로이소스 거상(巨像) - Colossus

거상(巨像). 그리스어 콜로소스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 등을 보고나서 칭한 말이 그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에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로도스섬의 콜로서스이다.로도스 항구에 서 있던 태양신 <헬리오스 청동상>은 높이가 36 m나 되었으며, 린도스(로도스 섬 동쪽에 있던 고대 도시의 이름)의 카리오스에 의해 BC 280년경 건조되었는데 BC 224년의 지진 때 붕괴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현존하는 것도 많으나 모두 기념비적인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피라미드만 현존함에 따라  새롭게 7대 불가사의를 지정하였습니다.

 

**현대의 7대 불가사의

1.이스터 섬의 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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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이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이스터 섬은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조그마한 화산섬으로 넓이가 약 166㎢이고, 칠레(1888년 이후 칠레의 영토가 됨) 앞바다 3800㎞에 위치하고 있다.
남위 27도, 서경 109분에 있고, 아열대의 온화한 기후의 섬이다.

'이스터 섬'의 이름은 이 섬의 발견자인 네덜란드 제독 로헤벤이 1722년 4월 5일, 즉 이스터(부활절) 날에 발견한 것에서 유래한다. 섬사람들은 이스터 섬을 '라파누이(큰섬)' 또는 '테피트오테헤누아(세계의 배꼽)'라고 부르고 있다.

이 조그마한 섬에 유명하게 된 이유는 '모아이(Moai)'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상들이 여기저기 서 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석상들은 다리가 없고 몸통만 있는 위풍당당하면서도 거북스러운 모습에 머리는 어울리지않게 크고 턱은 힘차게 앞으로 뻗고 귀는 괴상할 정도로 길다.

지금까지 이런 거대한 석상들이 약 1000개 가량 발견되었는데 키가 3.5-4.5m에 달하고 무게가 20t쯤 되는 것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무게가 90t이고 키는 10m나 된다.
대부분 서기 400∼1680년 사이에 만들어졌고 11세기경 가장 많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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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1722년 처음으로 이곳을 발견한 네덜란드 제독 야코프 로헤벤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섬에 키가 10m가 넘는 거대한 군인들이 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놀랐다.
제독은 침착하게 배를 섬에 접근 시켜 거대한 군인들이 단순한 석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제독이 상륙한 다음날 여러 가지 색을 몸에 칠한 원주민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보통 키에 붉은 머리의 백인이었다.

1968년 스위스인 다니켄은 주민들과 밀접한 대화를 나눈 결과 이스터 섬에 있는 거석들의 진상을 알아냈다고 발표했다. 그의 말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외계의 지적 생물체가 거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니켄은 원주민들이 돌로 된 연장만으로 조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석의 질이 단단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더욱이 거석의 규모가 너무 크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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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원주민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거석을 옮기기 위해 사용했을 통나무를 만들 숲이 주위에 없었다. 이스터 섬의 천연적인 환경은 이런 거석들을 만들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다니켄의 책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비슷한 류의 책들이 수 없이 발간됐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외계인의 작품이라는 모아이를 보기 위해 이스터 섬을 방문했다. 초호화 유람선의 일정에 이스터 섬이 단골메뉴로 포함됐다.
그러나 이스터섬을 체계적으로 연구 한 학자들은 외계인이 모아이를 만들었다는 설명은 한마디로 책을 팔기 위한 장사속이라고 일축했다. 모아이는 신비에 가득찬 유물이 아니라 이스터섬 주민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2.하기아 소피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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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 성당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이스탄불(현재 터키의 수도이며 이슬람이 많은도시라는 뜻)이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조되었다.

비잔틴 문화의 최고 건축물로써 아야 소피아(Aya Sophia)라는 현지어로 불리며 현재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현재의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532~537년)으로 세계의 교회 중 4번째(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로 크며,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됐다.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의 작은 교회로 지어졌으나, 404년 알카디우스 황제 때 화재로 무너졌으며 그 후 데오도시우스 2세 때 두 번째 성 소피아 대성당이 완공(415년)되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니카의 반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니카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비인 데오도라(이집트 출신의 댄서) 때문에 생긴 반란이었다.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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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내부구조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그러나 그녀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과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도의 단성론(콘스탄티노플에서는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하느님 자신이라는 양성론을 채택했다)을 믿는다는 것을 빌미로 히포드롬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 반란군의 기세에 눌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난을 피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려 했으나 그를 데오도라가 저지했다.

다음 순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히포드롬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단숨에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제2차 소피아 성당이 파괴되었으며, 그 잔해 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황제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에 걸맞는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수학자 이시도르를 투입하였다.

건축을 시작한 후 5년 10개월 만인537년에 소피아 성당은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3.스톤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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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헨지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환상열석(環狀列石)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조물의 하나인 스톤헨지(StoneHenge)는 영국 남부 솔즈베리 평야(Salisbury Plain)에 위치하며, 고대 영어로 '공중에 걸쳐 있는 돌'이라는 의미이다.

5천년전 이 곳엔 초기 석기시대 사람들이 정착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별 흔적을 남기진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적들은 청동기인들의 업적이다.

스톤헨지의 건조가 착수된 것은 기원전 2800년경이며,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로 완성된 것은 기원전 156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톤헨지는 원형(圓形)의 유적으로 각각의 거석들은 모두 한 중심점을 향해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바깥 도랑과 둑, 네모꼴 광장과 방향표시석인 힐스톤, 돌기둥을 세워 놓은 입석군(立石群), 중앙 석조물 등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2100년경 스톤헨지로부터 자그마치 385km나 떨어진 웨일즈 남서부의 프레슬리산에서 청석(blue stone)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져 왔는데, 최고 5톤까지 나가는 이 돌들을 옮기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썰매나 뗏목을 이용해 육로와 해상을 번갈아 가며 운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스톤헨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향표시석 힐스톤은 동쪽을 가리키는데, 그것도 하지(夏至)에 해가 뜨는 방향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하지날 힐스톤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해가 떠올라 중앙제단을 비췄던 시기는 천문학적으로 BC 1840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힐스톤을 세운 시기를 과학적으로 측정한 연대와도 맞아 떨어져 기묘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건축자들이 상당한 천문학적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래서 파종과 수확의 시기를 완전히 파악하고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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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환상열석 중심축에서 30m를 벗어난 자리에는「사르센 원」이라고 불리는 둥근 띠가 있다.
사르센 원을 따라 가면 두개의 커다란 돌을 세워 놓고 그 위에 또 다른 돌을 눕혀 놓은 삼석탑(三石塔)을 만난다.

돌 한개의 무게는 25t에서 최고 50t까지 나간다. 기중기와 같은 기구가 없던 당시에 50t 무게의 돌을 어떻게 운반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히 남는다.

학자들은 지레 받침대와 밧줄을 이용해 돌을 움직였을 것이라고 과학적인 추측을 할 뿐이다.

4.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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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으로써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춘추시대 제(齊)가 영토방위를 위햐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통일(BC 221) 후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허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근년에 이 장성의 동부 유지(遺址)가 둥베이지구에서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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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흉노로부터 지키려고 장성을 란저우(蘭州) 북방에서 서쪽으로 둔황(敦煌) 서편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방민족의 활동으로 장성 위치는 남하하여, 6세기 중엽 북제(北齊)는 다퉁(大同) 북서에서 쥐융관(居庸關)을 거쳐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을 축성하였다.

수(隋)는 돌궐·거란 방비를 위하여 오르도스(내몽골자치구의 중남부) 남쪽에 장성을 쌓았다.

당대(唐代)에 들어서 북쪽까지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고,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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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明)나라시대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관광 대상이 되고 있는 바다링〔八達嶺〕 근처의 장성은 높이 8.5m, 두께는 밑부분 6.5m, 윗부분 5.7m이며, 위에는 높이 1.7m의 연속된 철자형(凸字形) 담인 성가퀴(城堞)를 만들고 총안(銃眼)을 냈고, 120m 간격으로 돈대(墩臺)를 만들어 군사의 주둔과 감시에 이용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본토와 만주·몽골 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5.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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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을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80년) 때 완공하였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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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거대한 바위 축대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 도록 설계되었다.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188 m, 최소 지름 156 m, 둘레 527 m, 높이 57 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1층은 토스카나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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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
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이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 및 천막 지붕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등도 벌였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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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 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데 재료로 쓰이기도 해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다가 18세기 경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6.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Pyramid)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와력(瓦礫)의 산으로 변한 것과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위의 사진에서는 가장 뒤에 있는 것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가운데에 있는 피라미드가 가장 커 보이는데, 이것은 원래 높은 땅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왼쪽 사진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큰 피라미드가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 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건조법] 피라미드를 건조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核材)·내장재·전재(塡材)·외장재의 순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아졌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진다. 정상까지 다 쌓고나면 위에서부터 외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외장은 정성들여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 장 끼워지지 않은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된다. 

 

7.피사의 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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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의 사탑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피사 대성당(Duomo di Pisa)의 부속건물(대성당, 세례당, 종탑)중 3번째이며 마지막 구조물로써, 중세 도시국가 피사가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 함대에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세워진 종탑이다.

흰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꼭대기 종루를 포함해 8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는 55.8m, 무게는 14,500t 이나 된다.
탑내부는 나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을 통해 종루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종루에는 각각 다른 음계를 가진 7개의 종이 걸려있다.

1174년에 착공된 피사의 사탑은 이탈리아 천재건축가 보라노 피사논의 설계도에따라 탑을 만들어가던 중, 3층까지 쌓아올렸을 때 공사관계자들은 지반 한쪽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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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책임 기술자였던 보나노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게 되었다.

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몇 번씩 공사를 중단했으나 결국 1350년에 맨 꼭대기층이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물론 건축당시부터 의도적으로 기울어진 탑을 세운것은 아니다.

1년에 1mm정도 기울어지는 미세한 자연 현상이 누적되다보니 오늘날과 같이 탑의 꼭대기가 수직선에서 무려 5m나 기울어졌다.

현재는 탑의 기울기가 멈춘 상태다. 최근 영국 런던대학의 토질 기계학과 존 부를랜드 교수는 "피사의 사탑은 이제 기우는 것은 멈췄다. 이는 지난 7세기만에 이룩한 개가"라고 말했다.

사탑이 이처럼 위태로운 상태에서도 수천년 동안 용케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세계7대 불가사의에 대하여 복사하지 않고 이 많은 양을 직접 쓸 수 있는 사람을 �아보세요.

출처: 네이버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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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7대 불가사의 까닭

hhh555kk9 (2007-07-08 18:41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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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7대불가사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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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순대로 붉은 피라미드, 굴절피라미드, 계단식 피라미드, 외벽이 붕괴 된 피라미드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4각형 토대에 측면은 3각형을 이루도록 돌이나 벽돌을 쌓아올려 한 정점에서 만나도록 축조한 기념비적 구조물로 여러 시대에 걸쳐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서아시아·그리스·키프로스·이탈리아·인도·타이·멕시코·남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의 몇몇 섬에 지어졌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기 원

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터바에서 발전된 것으로, 제18왕조 초에 왕묘가 암굴묘(岩窟)의 형식을 취할 때까지 계속된다. 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의 피라미드 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 변이 63m인 직사각형 석조 마스터바로, 중앙에 깊이 28m의 수혈(竪穴)을 파고 그 밑에 매장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확장공사가 시작되어, 결국 마스터바를 6단 포개놓은 모양의 밑변 109×126m, 높 이 62m의 계단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헬리오플리스를 중심으로 예로부터 존재했던 태양신 숭배가 피안(彼岸)의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계단은 죽은 국왕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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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태양신과의 결부는 후의 정통 피라미드의 출현으로 한층 긴밀해졌다.
피라미드 그 자체는 왕의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음식물과 가지각색의 물품을 진열하여 제사를 지내는 장소도 필요했다.
그래서 피라미드 북측에 장제전(葬祭殿)이 건조되고, 다시 동쪽에 세드제의 의식을 행하는 신전·소신전·중정이 남쪽에는 계단이 있는 대중정이 축조되었다.

그것들을 높이 10m, 동서 277m, 남북 545m의 사각형의 주벽으로 돌러 장대한 묘소를 형성하였다 <!--tr>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이집트의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는 모두 제4왕조 (B.C. 2600 ~ B.C.2480)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큰 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로 높이가 148미터에 이른다 .(현재는 137미터)
다음으로는 카프레 왕의 것으로 136미터, 세번째가 멘카우레왕의 것으로 62미터에 달한다.

왼쪽 사진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이고 아래 사진에서는 가장 뒤의 것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가운데에 있는 피라미드가 가장 커 보이는데, 이것은 원래 높은 땅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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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멘카우레왕, 카프레왕, 쿠푸왕 피라미드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밑변의 길이가 233미터인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각 모서리가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고, 거의 완전한 직각을 이루고 있다.

이 피라미드는 입구와 조그만내실을 제외하면 모두 석회석으로 이루어 졌는데 돌의 크기의높이 1미터 폭 2미터 길이는 각각 다르다.

평균 2.5톤의 이 돌을 밑변에서 꼭대기 까지는 210단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230만 개 (또는 250만 개)의 돌이 필요하였다.

가령 이런 돌로 돌집을 쌓으면 1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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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앞쪽에 있는 큰 피라미드가 쿠푸왕의 피라미드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또한 어떤 전문가는 이런 돌을 30센티미터로 잘라 연결하면 지구의 2/3을 에워 쌓을수 있다고 하며 높이 3미터 두께 30센티미터로 자른다면 프랑스의 전체를 둘러쌀 수 있다고 한다.

이 돌들의 무게를 합치면 684만 8,000톤으로 만약 적재량 7톤짜리 화물로 운반하면 97만 8,286량의 화물차가 필요한데 이 화물차들을 연결해보면 그 길이는 6,200킬로미터에 이른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사업은 돌을 캐네어 뗏목으로 운반하고 공사를 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고 피라미드의 지하공사를 하는데만 적어도 10만명의 노예가 석 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게 쌓아 올리는데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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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푸왕 피라미드의 내부구조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a.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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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마문이 판 도굴 갱으로 창건때는 석재로 가려져 있었다.
알 마문은 폭약을 이용해 진짜문 밑에 지금의 관광객 들이 지나드는 지금의문을 만들었다.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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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약 17m, 중심선보다 동쪽으로7.3m 가량 벗어난 곳에 있다.
상부에는 합각머리 모양으로 돌이 배치되어 있고, 현재는 철제문으로 봉해져 있다.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b. 지하로 가는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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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c. 지하의 방

지하 30m, 피라미드의 정점 거의 바로 아래에 있다. 지하의 방 바로 앞에는 움푹패인 직사각형의 방이 있는데 용도는 분명하지 않다.

d. 하강통로

높이 1.2m, 폭1m 의 좁은 통로로 어른은 서서 걸을수 없을정도다. 기울기는26° 16' 이고 약 97m 정도 내려가면 수평해지고, 밑으로 9.7m 더 내려가면 지하의 방 에 도달한다.

e. 상승통로

기울기는 하강 통로와 같은26° 16' 이고, 넓이도 거의 같다. 길이는 약 40m, 이고 입구는 무게 5톤의 3개의 화강암으로 막혀있다.

f. 여왕의 방

안쪽 길이는5.74m, 폭5.23m, 높이6.22m 의 합각머리 모양 천장을 가졌다. 여왕의 묘실은 아니다.
여왕의 방에는 통기 구멍이 있기는 하지만 밖으로 끝까지 관통하지는 않고 중간에 끈겨있다.

g. 통기구멍

왕의 방에는 두 개의 환기창 구멍이 나있다. 통기 구멍의 용도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다.
어떤학자는 특정한 별자리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근거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다.
그리고 이 통기구멍에서는 가로, 세로, 두께가 각각 1피트, 4인치, 1/8인치인 철제판이 발견되었다.
이집트 에서는 대 피라미드 건설 당시에 아니면 , 그시기에 이미 철이사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대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철판을 분석한 결과 그것은 채광되어 정련된 철이지 운석등에서 얻은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 철판 성분에는 인위적으로 주석을 매우 적게 함유했다고 하고, 그 철은 1,000도 이상에서 녹았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철을 구하기가 어려웠을뿐 철의 사용법과 정련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h. 대회랑

대회랑은 높이8.5m, 아래쪽 폭은2.28m 이고, 좌우 각각 7개의 잘 다듬어진 석재가 위로 겹겹이 쌓여있다.
벽은 위에놓인 석재가 아래보다 7Cm 씩 안쪽으로 돌출되도록 하여 전체적으로 초엽 구조를 이루고 천장의 폭은 1.04m 이다.
회랑은26°16' 경사, 평행사변형을 유지하면서 위를 향해46m 이다.
그리고 밑에서 위로 갈수록 폭은 조금씩 좁아진다.
대회랑은 피라미드 전체높이의1/3위치에 있으며, 건축물의 상부2/3의 하중을 지탱하고 균열없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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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푸왕의 방 구조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a. 왕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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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방의높이는 5.8m, 길이 10.5m, 폭 5.25m, 밑면은 정확히 2:1의 비율로 이루어졌다.
높이가 밑면의 대각선 길이의 절반으로 설계 된 직육면체이다.

이 방은 지상에서 50m 지점에 위치한다.
바닥은 열 다섯 장의 두꺼운 화강암판이 깔려 있고, 벽은 10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벽에는 70톤의 화강암이, 천장에는 50톤 무게의 화강암 아홉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의 한쪽 구석의 천장에는 균열이 나있고, 균열에는 몰타르가 발라져 있다.
이 균열은 피라미드가 완성되기 전에 이미 나있었으며, 방의 구조상 받게 되는 뒤틀림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이 뒤틀림은 건설 당시에 생겼으며, 그 균열의 정도는 더 이상의 진행은 없다.
그리고 방 안의 어디에도 문자나 그림 같은 건 없다
.



g. 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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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석관은 외부체적이 2,332.8리터로서 정확히 내부 체적의 2배이다.

처음 발견당시에 뚜껑은 없었다. 시신과 부장품도 없었다.
석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기자의 쿠푸왕 피라미드(Pyramid) [ 6 / 5 page ]

피라미드 건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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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건조법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피라미드를 건조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내장재-전재-외장재의 순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아졌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진다.

정상까지 다 쌓고나면 위에서부터 위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외장은 정성들여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장 끼워지지 않은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된다.




피라미드의 미스테리

쿠푸왕 피라미드는 원래 새하얗게 빛나는 석회석과 금박을 입힌 30피트의 뚜껑이 덮여 있었다.
그렇게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13세기의 대지진 때 벽에 금이 가는 등 급격하게 손상되었다.
그 후 석회석은 건축에 사용하기 위해 잇따라 반출되어 지금처럼 돌의 모습 만 남아 있을 뿐이다.

쿠푸왕 피라미드는 도굴방지를 위해 입구를 돌로 막아서 오랫동안 내부의 구조를 알 수 없었는데 818년 이집트의 회교왕 알 마문이 피라미드에서 자고 있다고 하는 쿠프왕의 막대한 보물을 찾아 북쪽 사면밑을 파 내려갔을 때 안의 통로를 찾아 드디어 왕의 현실(玄室)을 발견했다.

그런데 현실에 있는 석관은 텅 비어 보물은 물론이고, 아무리 찾아도 왕을 발견할 수 없었다.
투탕카멘 왕의 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의 왕의 유해는 보통 엄청난 부장품과 함께 매장되었다.
도굴범이 노리는 것이 부장품이지 유해를 훔쳐 가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부장품과 미라 모두 없어졌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이때부터 대 피라미드는 수수께끼의 건조물이라 일컫게 되었다.

왜 피라미드 안에 부장품과 미라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발견한 방은 외관뿐이고 왕의 묘를 설치한 방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설.
또 하나는 대피라미드는 묘가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첫번째 설에 대해서는 기원전 5세기경 이집트를 여행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쿠프왕의 묘는 피라미드의 지하에 나일강에서 끌어들인 물로 둘러싼 공간에 안치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지하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현대는 대피라미드는 묘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건축 속의 과학(피라미드의 무게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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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의 내부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고대 건축물은 기하 형태와 숫자를 통해 우주의 비밀을 지상에서 표현해 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네 개의 정삼각형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사각뿔형태로 구성됐다.
이 사각뿔의 밑변과 경사면이 이루는 각도는 52도 이렇게 만들어지는 피라미드의 무게 중심에는 우주의 에너지가 모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라미드의 무게 중심에 녹슨 면도날을 놓으면 녹이 지워진다. 초자연적인 신통력을 이용하는 치료 가운데에는 피라미드의 무게 중심에 환자를 놓아 우주의 에너지를 이용하려는 방법도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경우에도 파라오의 미라가 놓이는 무덤은 정확히 무게중심 지점과 일치했다.
미라가 피라미드의 무게 중심에 놓임으로써 우주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집트 인들도 처음부터 미라를 피라미드의 무게 중심에 위치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고왕 국제4조의 쿠푸왕(기원전 2570년경)에 피라미드는 비로소 완전한 정삼각형으로 구성되는 사각뿔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미라가 피라미드의 무게 중심에 매장된 것도 이때였다.

그 이전까지의 파라미드는 불완전한 바정형 이었으며 미리는 파미드 밑의 땅속에 묻혔다.


쿠푸왕 피라미드의 경우 묘실로 가는 통로가 중간에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이 가운데 한 갈래는 지하로 이어진다.
이것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땅속의 가짜 묘실로 인도하는 일종의 속임수 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미라를 땅속에 묻던 방식의 잔재이기도하다.

위대한 파라오 쿠푸는 피라미드의 무게 중심 속에 숨어 있는 우주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 바로 그 무게 중심에 누워 영생하며 내세를 이어가 이집트 세계를 계속 보살필 수 있었다.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정원(Hanging Gardens of Babylon) [ 2 / 1 page ]

세미라미스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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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라미스 공중정원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BC 500년경 신(新)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수도인 바빌론 성벽(城壁)에 건설한 기이한 정원으로 <공중정원(空中庭園)> <낚시뜰>이라고도 한다.

이름처럼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있다는 뜻이다.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露臺)에, 성토하여 풀과 꽃, 수목을 심어놓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한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 꽃이랑 덩굴초랑 과일 나무를 많이 심도록 한 이 파라미드형의 정원은 마치 아름다운 녹색의 깔개를 걸어놓은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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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끌어 올리는 원리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그런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 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 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는 방을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

각종 기록을 더듬어 보면 그것이 피라미드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기단(其壇)의 한 모서리의 길이가 100m를 넘었고, 높이 15m의 토대(土臺)를 쌓았으며 그 위에 층상(層狀)의 건조물(建造物)을 세우고, 제일 위의 노단(露壇)은 넓이 60㎡, 높이 105m로 30층 건물 높이와 같았다고 한다.

각 단(壇)마다 거름흙을 운반해서 화단과 수림을 만들어 놓고, 유프라테스강에서 퍼 올린 물을 탱크에 모았다가 관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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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이 피라미드와 같은 노단의 외곽은 공랑(控廊)의 형태를 가졌고 그 내부에는 크고 작은 많은 방과 동굴ㆍ욕실 등이 있었으며, 벽체(壁體)는 벽돌에 아스팔트를 발라 굳혀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단부분을 둘러싼 평지에는 흙을 쌓아 올려 크고 작은 나무를 심어 놓았으며 이러한 노단이 마치 숲에 덮힌 작은 언덕과 같아 보인다.
그것이 바빌론의 평야 중앙부에 마치 하늘에 걸쳐 있듯이 높이 솟아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공중정원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이 정원은 일명 현수원(懸垂園)ㆍ수하원(垂下園)이라고도 부른다
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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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바빌론은 현재 이라크의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었던 고대 도시로 기원전 626년경 아시리아가 멸망하면서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수도로 이곳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곳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 왕국의 키약사레스 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하여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었다.


발굴 및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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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바빌론의 발굴은 독일 동방협회에 의해 1899년에 처음으로 시작 되어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되다가 마침내 최전성기의 궁전, 이슈타르문, 성벽등이 있는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은 장엄함을 드러내게 되었다.

공중 정원에 대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의 페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있다.

이라크정부는 이 정원을 오늘날 다시 복원할 것을 추진중에 있으며, BC 4세기까지 약 1500년 동안 번창했던 바빌론은 오늘날의 바그다드 남쪽 약 95㎞ 지점인 유프라테스강변에 해당된다.

  에페수스(Ephesus)의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 [ 3 / 1 page ]

아르테미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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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신전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아르테미스 신전은 처녀와 정절,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인 아르테미스를 모시기 위해 에페수스 사람들이 범국민적으로 건설한 신전으로 기원전 6세기 중엽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 때 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120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신전은 높이 20미터 정도로 백색의 대리석을 깎아, 127개의 기둥을 이오니아 식으로 세우고 지붕을 이어 만들어졌다.

이것이 세워지고 난 후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이곳을 방문하여 보고 이집트의 피라미드, 모에리스에 있는 라비린토스 등 세계적인 걸작에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걸작으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원전 356년 10월,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가 후세에까지도 유명해질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고의적으로 이 신전에 불을 질렀다.
신전이 불타버리자 디나크라테스는 재건에 바로 착수했는데 이때 에페수스에 살고 있는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의 귀금속을 팔았고, 각지의 왕들은 기둥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특히 아시아로 원정을 떠나던 알렉산더 대왕은 완성 중이던 이 신전에 마음이 빼앗겨 자기의 이름으로 이 신전을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공언했으나, 이방의 신전을 에베소에 세울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에페수스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 복구 사업을 국가적인 대사업으로 삼고, 그 당시 가장 훌륭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2배나 더 크고 빼어난 신전으로 만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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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후 휴식을 취하는 아르테미스 여신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에페수스인들은 파르테논 신전이 높이 10미터 대리석 기둥을 58개 사용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높이 18미터짜리 기둥을 127개 사용하였고 길이나 폭도 파르테논 신전의 두배 정도로 만들었다. 아르테미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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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그런데 화려한 신전이 세워지고 영화를 누리게 된 에페수스시에 기독교의 물결이 밀려들어 왔다.
우상 숭배를 금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는 자신들의 교의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요한 계시록 제 2장은 에페수스 교회에 보내는 경고의 편지로 첫사랑을 버린 것을 반성하고 처음 하던 일을 다시 하지 않으면 등경을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고 적고 있다.
사도 바울도 이곳에서 우상 숭배를 하지 말 것을 권유하면서 에페수스 사람들과 있었던 충돌에 대하여 적고 있다.

형상화된 신의 이미지를 숭상했던 문화와 내면의 신성을 표현하려고 했던 문화가 서로 마찰을 일으켰으나 아르테미스 신전은 건재했고 기독교는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어 갔다. 기독교도와의 충돌에서도 에페수스 사람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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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그러나 신전은 기원 후 260~268년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해온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되었고, 이때의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후 신전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부숴진 지붕이나 원기둥 등은 건축재료로 쓰기 위해 운반해 갔다.

사람들은 신전의 잔해들을 주으려고 이곳으로 왔다. 신전에 서 있는 돌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폐허 위로는 먼지와 흙이 쌓이게 되었고, 마침내 땅 밑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자 그 마을 사람들도 신전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 사람들이 없게 되버렸다.



발굴 및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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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신전의 이오니아식 기둥의 바닥 드럼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과거에 우람한 상선과 함대를 맞이했던 에페수스는 약간의 주민들만이 살아가는 늪지로 변해있었다.

마을의 어떤 곳이 과거에 아름다움과 영광을 가져다주었던 신전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다가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J.T.와트가 대영 박물관의 원조를 받아 11년동안 고생하다가 지하 7m 지점에서 대신전을 발굴했다.

와트는 과거의 역사서와 지리서, 철학서를 가지고 이를 고증하였고, 신전에서 발굴한 건축용 석재, 기둥, 조각을 토대로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꽤 정확하게 신전의 본래 모습을 복원할 수 있었다.

로마의 남쪽 25 km에 위치한 아리키아 부근 네미 호숫가에 있는 디아나 네모렌시스는 가장 유명한 신역(神域)으로서, 이곳에서는 디아나가 여성의 수호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로마의 유명한 디아나 신전은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다.

아르테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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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제우스와 레토 사이의 딸이다. 그녀는 쌍둥이 남매인 아폴론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서는 곧바로 어머니의 해산을 도왔다.

이 여신은 아주 어릴 때 이미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평생 처녀로 지내게 해 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 여신은 항상 활과 화살통을 지니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항상 많은 요정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이 요정들 역시 여신과 마찬가지로 순결을 지켜야 했다. 이를 어길 경우 여신은 용서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강간을 당한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르카디아 지방의 요정 칼리스토의 아름다움에 반한 제우스는 아르테미스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그녀 앞에 나타나 스스럼없이 그녀를 안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칼리스토는 무심코 그 포옹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 제우스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고 그녀를 겁탈하였다. 이 짧은 사랑에서 아이가 생겼다.

달이 차서 배가 불러오자 아르테미스는 모든 것을 눈치챘다. 여신은 화를 참지 못하고 칼리스토를 활로 쏘아 죽였다.
그러자 다급해진 제우스는 칼리스토를 곰으로 변하게 하여 하늘로 끌어 올렸다.
그녀는 하늘에 올라가서 '곰' 별자리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 '아르카스'는 '아르카스'족의 조상이 되었다.

미남 사냥꾼 '오리온(Orion)'은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아르테미스의 질투를 불러 일으켜 여신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일설에는 오리온이 아르테미스와 함께 사냥하다가 갑자기 욕정을 느껴 여신에게 덤벼들자 여신이 전갈을 불러내어 오리온의 발뒤꿈치를 물어 죽게 했다고도 한다. 오리온은 죽은 후에 하늘로 올라가 '오리온' 별자리가 되었다.

아르테미스는 처녀 사냥꾼으로 산과 들에서 사슴을 쫓는 활의 명수라고 하며, 그의 화살은 산욕(産褥)을 치르는 여자를 고통없이 그 자리에서 죽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한다.
또한 처녀의 수호신으로서, 순결 정절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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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 된 악타이온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그녀는 골짜기에서 활을 메고 수렵을 다니다가 지치면 샘에 와서 반짝이는 물에다 청순한 처녀의 몸을 씻곤 했는데 어느날 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몸단장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악타이온이 이 모습을 보자 그를 사슴으로 만들어 동료 사냥꾼들이 이끌고 왔던 개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목숨이 끊어지게 했다고 전해진다.

아폴론이 태양의 신인 데 반하여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는 월신(月神) 셀레네, 헤카테와 동일화되었기 때문이며, 아르테미스라는 이름도 그리스계(系)가 아니고 옛 선주민족(先住民族)의 신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아르테미스는 비록 올림포스의 열두신에 속하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올림포스 궁전에 머물기보다는 숲이나 산, 계곡에서 들판에서 사냥을 하며 보냈다.

올림피아의 제우스(Zeus) 신상(神像) [ 3 / 1 page ]

제우스 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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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신상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를 믿었다.
제우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이며,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4년마다 지내는 올림픽)를 지냈다.

고대 그리스에는 아테네, 스파르타, 앨리스 등의 도시 국가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처음에는 땅의 신 크로노스와 여신 헤라를 숭배했지만 뒤에 제우스 신을 숭배하게 되어서 B.C 457년에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 앨리스 지방에 제우스 신전을 만들었고, 그 안에 '페이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을 안치하였다.


페이디아스는 아테네 화가 카르미테스의 아들로 파르테논 신전의 정면 입구와 소벽을 조각한 당대 제일의 조각가였다.
그리스 고전전기(古典前期)의 숭고양식(崇高樣式)을 대표하는 페이디아스는 신(神)들의 상을 많이 만들어 ‘신상 제작자’로 칭송받은 사람이다.

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네 여신상은 페이디아스의 2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피디아스는 8년여의 작업 끝에 제우스 상을 완성했는데, 그는 제우스의 신성함 위엄과 함께 너그러움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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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어떤 고대인은 제우스상을 보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도, 불행과 비극에서 헤어 나지 못하는 사람도 만약 우뚝 서 있는 제우스상을 보게 된다면 고통과 절망을 잊어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감상을 토로했다고 한다.

대지 위에 우뚝 세워진 신전에는 양옆에 열세 개씩, 양끝에 여섯 개씩 장엄하고 무거운 도리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완만하게 기울어진 지붕이 덮여 있다.
이 신전의 한가운데 있는 제우스 상은 높이가 90㎝, 폭이 6.6m인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2.4m 되는 상은 거의 천장을 닿고 있다.

제우스 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그 위에 보석과 흑단, 상아를 박아 장식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금으로 된 발 디딤대에 올려져 있는 양다리는 거의 예배자의 눈높이와 일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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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오른손에는 황금과 상아로 만든 승리의 여신(Nike)상을 떠받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황금을 박아 장식한 지팡이(왕홀)를 쥐고 있다. 지팡이 위에는 매가 앉아 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어깨에는 꽃과 동물이 새겨진 황금의 아름다운 망토가 걸쳐져 있다.

426년에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교신전파괴령에 의해 신전이 헐리게 되었다.
게다가 522년과 551년의 지진으로 크로노스 언덕이 허물어졌고, 그라데오스 하천의 범람으로 신역은 3~5미터 아래 모래층으로 매몰되어 제우스 상은 오늘날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제우스(Z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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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신들 중 최고의 지배자로 '낮의 밝은 하늘'을 의미하며 천상을 지배하는 기상학적 현상(비,눈,우박,번개,우뢰)을 맡아보는 신인 동시에 인간 사회의 정치.법률.도덕 등 모든 생활을 지배했다.

신들뿐 아니라 인간은 제우스를 주인으로 섬겼다.
그러므로 제우스는 왕이고 인간의 왕들은 그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사투르누스)와 레아(옵스)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로노스는 <시간>을 상징한다. 그리스어 크로노스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크로노스는 자식을 낳은 족족 잡아먹는 것으로 전해지는데(자신의 자식 중에 자신을 누르고 왕위를 차지하는 자가 있다는 예언때문에), 크로노스의 이러한 속성은 태어난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자체의 속성을 상징한다.

제우스의 6남매도 크로노스에게 삼켜졌다가 다시 토해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제우스 6남매가 이로써 시간을 극복했음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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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어머니 레아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험을 모면한 제우스는 그의 첫번째 아내 테티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뱃속에서 그의 형제들을 토하게 한다.

형제자매와 함께 그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와 그 형제인 티탄 신속들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들을 정복하고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무한지옥에 가두어 버린다.

제우스의 무기는 천둥과 번개이고, 헤파이스토스(불카누스)가 그를 위해 만든 아이기스라는 방패도 가지고 있다.

제우스가 총애한 새는 독수리로 이 새가 제우스의 번개를 지니고 있었다.

1950년대 제우스 신전 터에서 페이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발굴 및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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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신전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1755년 독일인 학자 빈켈만(John J. Winchelmann :1717 ~ 1786)이 <고대 그리스 미술에 관한 논문>이 발표되면서 고대문화에 대한 열기에 불을 당기기 시작했다.

1766년 영국인 찬들러(O. Chandler)가 빈켈만의 고대미술사와 고대시가지지(古代詩歌地誌)의 두 권의 책을 안내로 삼아 이 올림피아 유적지를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 올림피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 엘리스주(州)에 있으며, 북으로 크로니온(Kronion;제우스 신의 부친 Kronos에서 유래됨) 산자락 구릉과 서쪽에 그라디오스(Gradios) 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운동경기를 마친 뒤에나 또는 연습 후 목욕이나 샤워를 이 그라디오스 강에서 했고, 또한 이 물을 끌어들여 올림피아 도시에서 목욕탕에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위치는 이곳이 정확했다.
찬들러는 발굴에 착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우스 신전'을 발굴하였다.

1829년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단기간 발굴에 착수하여 메도프(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그 후 50여 년이 흐른 1876년, 베를린 대학교수 E.쿠르티우스(1814~1896)의 발굴계획을 독일 정부가 승인한 후 그리스 정부도 발굴유물을 현지에 보관한다는 엄격한 단서를 붙여 허가하니 6년간에 걸친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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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이때의 발굴작업은 현재의 유적지 규모로 발굴됨으로 그 당시의 체육시설의 건축분야와 기록동판 13,800매, 비석 400개, 조각품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4차 발굴은 1937∼58년(제2차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중단)에 실시되었는데,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는 학술적으로 대단히 귀중한 성과를 올렸다.

1950년대 제우스 신전 터에서 페이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로도스(Rhodes) 항구의 크로이소스 대거상(大巨像) - Colossus [ 1 / 1 page ]

크로이소스 대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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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소스 대거상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B.C 407년경 로도스섬은 도시국가연합(Rhodo-Egyptian)의 수도로 건설되어 상업적으로 번성하고, 그들의 주요한 동맹국(Ialysos , Kamiros , 그리고 Lindos)과 함께 지중해 유수의 무역중심지로 발전하였다.

B.C 305년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오스 1세는 동맹을 깰 방법으로 도시를 관통할 수 없게 로도스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도시국가연합은 마케도니아를 무찔렀고, 그들의 단일성을 축하하기 위하여 장비를 팔고, 모은 돈으로 높이 36m의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청동상(철로 보강하고 돌로 무게를 더함)을 세워 로도스의 거상으로 알려졌다.

상상에 의해 만든 한 돋을새김 작품이 표현하듯이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항구 입구에 양다리를 벌리고 서 있기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은 중세시대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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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거상의 건설은 린두스 시(市)의 찰스가 12 년에 걸려 B.C 282 년에 끝마쳤다. 이 거상은 B.C 225년경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고, 거의 한 천년간동안, 상이 파괴된 채로 놓여있었다.

A.D 654년 아랍인이 로도스를 침범하여 부서진 대거상의 나머지를 분해하고, 그들은 시리아의 한 유태인에게 팔았다. 거상 조각이 시리아로 900 낙타의 등위에 운송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현존하는 것도 많으나 모두 기념비적인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건축 자재는 가장 순도가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대리석 계단을 사방으로 내서 중앙의 홀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이 신전이 기원전 250년 경에 완성되자, 곧바로 전세계에 그 규모와 화려함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에페수스시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더불어 시가지의 건축물들이 대부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던 성벽으로도 유명하여 관광 명소가 되었다.
에페수스 항구에는 관광객들을 태운 배들과 교역을 위한 상인들로 넘쳤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영묘(靈廟) - Musoleum [ 1 / 1 page ]

마우솔로스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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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솔로스 영묘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소아시아의 남서부에 있던 카리아의 통치자 마우솔로스의 영묘(靈廟)로서 그의 누이이며 미망인인 아르테미시아가 BC 353경~351년경에 지었다.

건축가는 피티우스(또는 피테오스)였고 4명의 뛰어난 그리스 예술가 스코파스·브리악시스·레오카레스·티모테오스 등이 조각을 맡았다.

로마의 저술가인 대(大)플리니우스(23~79)에 따르면 이 영묘는 거의 정4각형으로서 그 둘레가 125m에 이르렀다고 한다.

36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고 24단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꼭대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4두마차가 올려져 있었다.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유적의 단편으로는 그리스인과 아마존족의 전투장면을 새긴 프리즈와 마우솔로스 상으로 보이는 높이 3m의 조상 등이 있다.

이 영묘는 아마도 11~ 15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무너진 돌은 이 지방의 건물을 짓는 데 다시 사용되었다.

마우솔레움은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그 유품은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있다.
현재에 이르러 마우솔레움은 무덤건축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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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마우솔로스 영묘에서 발굴된 거대한 상(마우솔로스 상으로 추정)과 여인상(아르테미시아로 추정)이다.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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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거대한 말의 파편이고, 아래 사진은 그리스인과 아마존족의 전투장면을 새긴 프리즈이다.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Pharos) 등대 [ 2 / 1 page ]

파로스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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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스 등대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된 등대의 높이가 135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졌다.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각 층은 모두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지어졌다.(기울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음)

등대 안쪽에는 나선형의 길이 있어서 등대 꼭대기의 옥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이시스 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다 .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먼 본토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c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3㎞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으며 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 정도 떨어져 있는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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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B.C28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등대에 불을 지폈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파로스 등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등대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단단한 돌로된 등대가 무너진 것은 12c경으로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1100년과 1307년의 두차례의 큰 지진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반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등대의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그 모습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世界七大不可思議) 지도 - Seven Wonders of the World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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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가사의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 [ 1 / 1 page ]

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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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을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80년) 때 완공하였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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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거대한 바위 축대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 도록 설계되었다.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188 m, 최소 지름 156 m, 둘레 527 m, 높이 57 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1층은 토스카나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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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
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이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 및 천막 지붕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등도 벌였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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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 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데 재료로 쓰이기도 해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다가 18세기 경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의 스톤헨지(StoneHenge) [ 3 / 1 page ]

스톤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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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헨지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환상열석(環狀列石)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조물의 하나인 스톤헨지(StoneHenge)는 영국 남부 솔즈베리 평야(Salisbury Plain)에 위치하며, 고대 영어로 '공중에 걸쳐 있는 돌'이라는 의미이다.

5천년전 이 곳엔 초기 석기시대 사람들이 정착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별 흔적을 남기진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적들은 청동기인들의 업적이다.

스톤헨지의 건조가 착수된 것은 기원전 2800년경이며,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로 완성된 것은 기원전 156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톤헨지는 원형(圓形)의 유적으로 각각의 거석들은 모두 한 중심점을 향해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바깥 도랑과 둑, 네모꼴 광장과 방향표시석인 힐스톤, 돌기둥을 세워 놓은 입석군(立石群), 중앙 석조물 등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2100년경 스톤헨지로부터 자그마치 385km나 떨어진 웨일즈 남서부의 프레슬리산에서 청석(blue stone)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져 왔는데, 최고 5톤까지 나가는 이 돌들을 옮기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썰매나 뗏목을 이용해 육로와 해상을 번갈아 가며 운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스톤헨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향표시석 힐스톤은 동쪽을 가리키는데, 그것도 하지(夏至)에 해가 뜨는 방향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하지날 힐스톤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해가 떠올라 중앙제단을 비췄던 시기는 천문학적으로 BC 1840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힐스톤을 세운 시기를 과학적으로 측정한 연대와도 맞아 떨어져 기묘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건축자들이 상당한 천문학적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래서 파종과 수확의 시기를 완전히 파악하고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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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환상열석 중심축에서 30m를 벗어난 자리에는「사르센 원」이라고 불리는 둥근 띠가 있다.
사르센 원을 따라 가면 두개의 커다란 돌을 세워 놓고 그 위에 또 다른 돌을 눕혀 놓은 삼석탑(三石塔)을 만난다.

돌 한개의 무게는 25t에서 최고 50t까지 나간다. 기중기와 같은 기구가 없던 당시에 50t 무게의 돌을 어떻게 운반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히 남는다.

학자들은 지레 받침대와 밧줄을 이용해 돌을 움직였을 것이라고 과학적인 추측을 할 뿐이다. 
스톤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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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기하학적 질서
4개의 정삼각형이 돌아가면서 문과 기둥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한다. 그 외 6각형, 12각형의 질서도 찾을수 있다.

중앙제단에서 맨 앞쪽의 기준 점인 힐스톤을 일직선으로 바라보는 선이 기준선이다.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스톤헨지의 원형 평면은 4개의 정삼각형을 중심 주위로 돌려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 결과 스톤헨지 안에는 여러 종류의 12각형과 6각형이 내접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스톤헨지의 원형 평면 안에는 3, 4, 6, 12라는 네 개의 숫자가 복잡하게 어우러지면서 질서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구성 요소들은 고대 문명을 이루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원과 정삼각형, 그리고 정사각형은 가장 완벽한 기하 형태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고대인들은 원을 천상의 신인 코엘러스(Coelus)가 사용하던 상형 문자라고 믿었다.
12라는 숫자는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설명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숫자이다. 또한 6이라는 숫자는 약수들의 합과 자신이 같아지기 때문에 고대인들이 완전수(perfect number)라고 믿는 숫자였다.

이러한 숫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스톤헨지의 내부 구성은 천체의 운행과 변화를 읽어내는 고도로 발전한 컴퓨터였다.
예를 들면 스톤헨지 내에 있는 여러 개의 삼각형들 가운데 어떤 한 삼각형에 태양의 위치가 일치했을 때 이들은 파종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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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고대인들은 이미 태양의 궤적을 읽어내고 자연의 흐름을 물리적으로 추적해내는 계산판을 땅 위에 축조해 놓았다.
영국의 고대인들은 네 개의 정삼각형을 평면 위에서 돌려 육각형과 십이각형으로 구성되는 동심원 구도를 만들어 태양의 궤적을 읽어내고 자연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스톤헨지는 절기의 변화를 알려주는 달력이자, 천지의 기운을 읽어내는 천체 관측소였으며 고도의 복잡한 계산을 행하는 컴퓨터였다.

스톤헨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종모양의 독특한 토기를 만들어내던 청동기인들이었는데 이렇게까지 힘들게 운반해온 푸른돌로 백년간 건축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푸른돌보다 10배나 무겁고 높이는 7m나 되는 사암덩어리로 다시 건축을 시작했다.
화강암보다 훨씬 단단한 사암포석을 쪼고 다듬는 일은 고도의 기술과 노력을 요구했다.

이 돌들은 수많은 인력이 동원된 가운데 지랫대 등을 이용해 세워졌고. 다시 기둥위로 올려졌다.
이들은 왜 이 스톤헨지를 이룩한 것일까? 사실 그 이유는 아직도 알려진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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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도대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건축물들을 보면 온갖 추측이 나서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냥 무심히 지나치기에는 이 곳은 너무도 신비하며 장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해서 건축가들에 대한 전설같은 추측으로는 중세 시대 아더왕과 마법사 머린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라든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고대 아틸란티스인들이 세운 것이라든가 하는 추측들이다.

한편으론 화려한 무덤이 이 스톤헨지 주변에 많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죽은 전사를 위한 지하세계의 문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추측되기도 한다.
여기서 UFO가 자주 출연한다는 얘기들이 전해지는 것도 이 지역 모두가 거석문화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스톤헨지의 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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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스톤헨지 건조의 여러 단계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 내면 제1기는 토조(土造) 건조물이, 제2기는 목조(木造) 건조물이, 제3기는 석조(石造) 건조물이 세워진 시기이다.

제1기가 시작되는 기원전 3000년경에는 지름 약 110m의 고리 모양(환상) 도랑이 패였고, 그 흙을 이용하여 안쪽 둘레를 따라 둑이 만들어졌다.
바깥쪽 가장자리에도 어느 정도의 둑이 만들어지고, 북동쪽에 큰 입구, 남쪽과 남서쪽에 작은 입구가 설치되었다.
둑 안쪽을 따라 '오브리 구멍'이라고 불리는 56개의 구멍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 같다.

도랑에서는 곡괭이 모양의 사슴 뿔과 삽 모양의 황소 어깨뼈(견갑골) 등이 출토되었다. 아마 그것은 흙을 파는 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도랑에서 출토된 동물 뼈 가운데 흥미로운 것으로는 2개의 황소 턱뼈와 1개의 큰사슴 정강이뼈(경골)가 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이들은 도랑 축조 시기보다 훨씬 오래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톤헨지 이전의 의례 전통과 어떠한 연관을 시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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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제2기는 기원전 3000년기 전반에 속한다. 고리 모양 구조의 중앙부, 남쪽 입구로 향하는 구역, 북동부 통로 부근 등에 기둥을 박았던 것으로 보이는 많은 기둥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어떠한 목조 건조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동부 입구에서 바깥쪽으로 16m 떨어진 곳에도 4개의 기둥 구멍이 2m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현단계에서 확인된 증거로는 목조 건조물의 형상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북동부 통로 부근의 다수의 기둥 구멍은 나무 기둥열을 통하여 몇 개의 좁은 통로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다.

기원전 3000년기 중반경에는 특징적 청회색을 띤 '블루스톤'이라 불리는 돌이 쓰이게 되었다. 제3기의 시작이다.
블루스톤은 Q구멍, R구멍이라 명명된 쌍을 이루는 구멍에 원호 모양의 배열로 배치되었는데 후에 제거되었다.
마침내 '사센'이라 불리는 단단하고 거대한 돌을 직사각형으로 정형하여 놀랄 정도의 건축을 완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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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30개의 돌기둥이 지름 30m의 원둘레 위에 배치되고, 더욱이 그 꼭대기에 수평으로 문미석(문·창출입구 등의 윗부분에 가로 댄 나무 구실을 하는 돌. 여기서는 두 기둥 꼭대기에 걸쳐진 가로돌)이 얹혀져서 공중에서 연속하는 둥근 고리 모양을 만들어 냈다.

지상에서 문미석 윗면까지의 높이는 4.8m나 된다.
내부에서는 사센을 이용한 5조의 삼석탑(트리리톤)이 마제형(말굽형)으로 배열되었다.
삼석탑은 북동쪽에서 남서쪽 축으로 대칭으로 배열되고, 그것들이 구성하는 마제형은 북동쪽 입구 방향으로 열려 있다.
열린 부분에서 중앙부를 향하여 높이가 차츰 높아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탈리아 피사(Pisa)의 사탑 [ 2 / 1 page ]

피사의 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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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의 사탑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피사 대성당(Duomo di Pisa)의 부속건물(대성당, 세례당, 종탑)중 3번째이며 마지막 구조물로써, 중세 도시국가 피사가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 함대에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세워진 종탑이다.

흰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꼭대기 종루를 포함해 8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는 55.8m, 무게는 14,500t 이나 된다.
탑내부는 나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을 통해 종루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종루에는 각각 다른 음계를 가진 7개의 종이 걸려있다.

1174년에 착공된 피사의 사탑은 이탈리아 천재건축가 보라노 피사논의 설계도에따라 탑을 만들어가던 중, 3층까지 쌓아올렸을 때 공사관계자들은 지반 한쪽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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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책임 기술자였던 보나노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게 되었다.

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몇 번씩 공사를 중단했으나 결국 1350년에 맨 꼭대기층이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물론 건축당시부터 의도적으로 기울어진 탑을 세운것은 아니다.

1년에 1mm정도 기울어지는 미세한 자연 현상이 누적되다보니 오늘날과 같이 탑의 꼭대기가 수직선에서 무려 5m나 기울어졌다.

현재는 탑의 기울기가 멈춘 상태다. 최근 영국 런던대학의 토질 기계학과 존 부를랜드 교수는 "피사의 사탑은 이제 기우는 것은 멈췄다. 이는 지난 7세기만에 이룩한 개가"라고 말했다.

사탑이 이처럼 위태로운 상태에서도 수천년 동안 용케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적당히 기울어진 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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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피사 시당국은 지난 93년 사탑의 수직기울기가 5m나 되는 것을 감안할 때 2050년경이면 붕괴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자 부를랜드 교수에게 매달렸다.

특히 지난 89년 3월 파비오에 있는 8백년된 탑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무너지는 사고까지 난 터라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를랜드 교수의 처방은 의외로 간단했다. 탑의 기초를 강철 케이블로 묶어두고 콘크리트로 기초를 보강하는 한편 탑이 기울어지는 반대편 지반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쌓아두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보이고 있다.
1년이 안되는 사이에 탑꼭대기가 약 5cm 정도 되돌아섰다.
문제는 탑을 어느 정도까지 바로 세우느냐다.

전세계 토목전문가들로 구성된 '피사탑 국제위원회'는 현재 10도 정도의 기울기를 약 1도 정도만 되돌려 꼭대기가 수직선에 4.5m정도에서 고정시키기만 해도 사람이 올라가더라도 사탑이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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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피사 사람들이 사탑 붕괴 다음으로 절대 원치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똑바로 선 모습이 아닐까?

피사의 탑 그 자체가 아름다운 자태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유럽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건축물 중 하나가 된다면 과연 지금처럼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당하게 기울어진 채 영원히 서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사탑은 알고 나 있는지.


바로서는 피사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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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내년 5월 새단장 공개

보수공사를 위해 10년 전 폐쇄된 이탈리아 피사사탑이 내년 5월 초면 안전해질 것이라고 보수공사 책임 기술자인 미첼레 자미올코브스키씨가 16일 밝혔다 .

자미올코프스키 기술진은 지난 2월 이후 58.5m 높이의 사탑 기울기를 13㎝나 바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이 사탑은 이미 130년 전의 기울기 상태로까지 회복됐는데 자미올코프스키씨는 내년 중반 현재의 보수공사가 끝날 때쯤이면 26㎝를 더 바로잡을 수 있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년 중반에는 이 사탑의 기울기가 300년 전과 같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 사탑의 기울기가 바로잡히고 지난 800년 동안의 때를 말끔히 씻고 개장하면 이를 축하하기 위한 특별 파티가 내년 6월14일 거행될 예정이다.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 - Great Wall of China [ 2 / 1 page ]

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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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으로써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춘추시대 제(齊)가 영토방위를 위햐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통일(BC 221) 후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허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근년에 이 장성의 동부 유지(遺址)가 둥베이지구에서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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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흉노로부터 지키려고 장성을 란저우(蘭州) 북방에서 서쪽으로 둔황(敦煌) 서편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방민족의 활동으로 장성 위치는 남하하여, 6세기 중엽 북제(北齊)는 다퉁(大同) 북서에서 쥐융관(居庸關)을 거쳐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을 축성하였다.

수(隋)는 돌궐·거란 방비를 위하여 오르도스(내몽골자치구의 중남부) 남쪽에 장성을 쌓았다.

당대(唐代)에 들어서 북쪽까지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고,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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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明)나라시대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관광 대상이 되고 있는 바다링〔八達嶺〕 근처의 장성은 높이 8.5m, 두께는 밑부분 6.5m, 윗부분 5.7m이며, 위에는 높이 1.7m의 연속된 철자형(凸字形) 담인 성가퀴(城堞)를 만들고 총안(銃眼)을 냈고, 120m 간격으로 돈대(墩臺)를 만들어 군사의 주둔과 감시에 이용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본토와 만주·몽골 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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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대 특히, 그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동쪽은 보하이 만 연안의 산하이관(山海關)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의 북방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황하강(黃河)을 건너며, 산시 성(陝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뚫고 나와 다시 황허 강을 건너고, 실크로드 전구간의 북측을 북서쪽으로 뻗어 자위관(嘉 關)에 다다른다.

베이징의 북서쪽 바다링(八達嶺) 부근부터 쥐융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다퉁의 남쪽 안먼관(雁門關)에 이르는 부분은 2중으로 축성되어 있는데, 2,700㎞가 전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다.

산하이관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부분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이것을 전(塼)이라고 하는데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
바다링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 4.5m, 아랫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銃眼)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약 100m 간격으로 돈대(墩臺)가 설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황허 강 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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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문화혁명때 농부들은 집을 수리하고 돼지우리를 만들기 위해 장성의 돌을 훔치 곤 하였다.
장벽의 군데군데가 사라졌다. 마침내 1977년 정부는 어떤 돌이라도 가지고 가는 것을 불법으로 공포하였다.

오늘날 LOC와 ROGWACAC는 불침번을 유지하고 있다.
명왕조의 위엄으로 다시 복구된 장성의 구간은 일년에 수백만의 관광객-중국인과 외국인 모두 같이- 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만리장성은 현재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Hagia Sophia) [ 2 / 1 page ]

하기아 소피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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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 성당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이스탄불(현재 터키의 수도이며 이슬람이 많은도시라는 뜻)이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조되었다.

비잔틴 문화의 최고 건축물로써 아야 소피아(Aya Sophia)라는 현지어로 불리며 현재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현재의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532~537년)으로 세계의 교회 중 4번째(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로 크며,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됐다.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의 작은 교회로 지어졌으나, 404년 알카디우스 황제 때 화재로 무너졌으며 그 후 데오도시우스 2세 때 두 번째 성 소피아 대성당이 완공(415년)되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니카의 반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니카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비인 데오도라(이집트 출신의 댄서) 때문에 생긴 반란이었다.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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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내부구조
유순신 유니코서치 부사장
그러나 그녀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과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도의 단성론(콘스탄티노플에서는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하느님 자신이라는 양성론을 채택했다)을 믿는다는 것을 빌미로 히포드롬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 반란군의 기세에 눌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난을 피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려 했으나 그를 데오도라가 저지했다.

다음 순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히포드롬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단숨에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제2차 소피아 성당이 파괴되었으며, 그 잔해 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황제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에 걸맞는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수학자 이시도르를 투입하였다.

건축을 시작한 후 5년 10개월 만인537년에 소피아 성당은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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