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사랑/유럽 가고싶은 곳

벨기에의 노블레스, 어떤 집에서 살까

별을 그리다 2008. 3. 24. 17:51

 

벨지움의 노블레스, 어떤 집에서 살까


집이란 당대의 생활상과 사회상이 다양하게 어우러지고 버무려진 문화지층이며, 한 시대의 풍경이다. 환경문제가 심각해진 현대에 와서 집의 속내만을 달리하는 리노베이션은 많은 나라에서 꾸준한 흐름이 되고 있다. 특히 중세시대의 유물이나 다름없는 집을 허물고 신축한다는 것이 절차상 쉽지 않은 벨지움에서는 리노베이션을 통해 속내를 바꾼 집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흔한 일이다. 외관은 중세 분위기를 풍기는 집일지라도 실내는 모던 하우스로 꾸미거나 아예 집이 아니었던 것을 집으로 만든 사례도 적지 않다. 벨지움에서는 우리나라와 같은 고층 아파트를 만나는 것이 오히려 쉽지가 않다. 경상도만한 크기에 1천만 명이 살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은 데도 이들은 아파트를 선호하지 않는다. 벨지움에서는 아파트라는 것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공동주택이란 관념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벨지움의 노블레스로 불리는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이제부터 그들이 사는 집으로 한번 들어가보자.

경영자 윌리 나슨의 전원주택
 
피트햄에 있는 윌리 나슨의 전원주택.
 
목가적인 풍경이 사방으로 펼쳐진 피트햄(Petegem)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경영자 윌리 나슨(Willy Naessen)의 집이 있다. 8개의 사업장을 운영하며 벨지움에서 가장 덕망있는 기업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윌리 나슨의 집은 기업 총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 화려한 편은 아니었다. 그의 명성만 믿고 대저택을 예상했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윌리 나슨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지, 부와 명성을 과시하는 곳이 아니다, 라는 것이 집에 대한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이 오래되고 평범한 집에서 이제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경영자 윌리 나슨. 
 
그렇다면 집앞에 있는 스위밍풀은 뭐죠? 수영장 디자이너이자 건축업을 함께 하고 있는 그의 직업상 집에 스위밍풀이 있다고 이상할 건 없다. 만일 그것이 부의 과시였다면 좀더 넓고 화려한 스위밍풀이 집 앞에 있었어야 한다. 어쨌든 그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그의 집은 넓은 들을 그대로 정원으로 삼았을 뿐, 건물은 주변의 여느 농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때마침 야외식탁에서 가족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매주 수요일은 윌리 가족의 식사모임이 있는 날이라고 한다. 윌리는 이날 모임을 위해 말농장에서 바쁘게 지프차를 타고 달려왔다. 기업의 회장쯤 되면 기사를 따로 둘만도 하지만, 그는 손수 지프차를 몰고 다니는 게 훨씬 편한 모양이다.
 
         
수영장(위왼쪽)과 말장식품(위오른쪽). 윌리 가족의 정기 식사모임(아래). 
 
윌리 나슨의 집은 지은 지 30년이 지났다. 벨지움의 여느 농가와 다름없는 외관만큼 실내도 그리 화려하게 꾸며놓진 않았다. 다만 유별난 것은 여기저기 수없이 많은 말 장식품들이다. 말 편자와 마차는 물론이고, 말 그림과 말 조각품, 말 인형, 말 소품이 거실을 온통 장식하고 있다. 심지어 실외등과 문고리 까지도 말 장식이 달려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야외 식탁이 있는 벽면에 그려진 대형 말 그림이다. 여러 마리의 말이 마차를 끌고 가는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일반적인 말과 그림 속의 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벨지움의 전통말이라고 한다.
 
보통 말보다 털이 많고 300킬로그램 정도 무게가 더 나가는 벨지움 전통말.
 
윌리 나슨이 집안을 온통 말로 데코레이션을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바로 워트햄(Wortegem)에 있는 벨지움 전통말 농장의 주인이다. 12년 전 윌리 나슨은 암 선고를 받고 죽을 고비를 맞은 적이 있다. 암투병을 이겨내고 그가 얻은 결론은 하고 싶었던 취미생활을 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 지도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책무)를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좋아했던 그가 벨지움 전통말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다. “나는 52세까지 일만 했어요. 암 투병으로 내 인생이 바뀌었죠. 기업을 통해 번 이득은 직원들이 납득할만큼 직원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 난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벨지움 전통말을 키우며,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세계마차경주대회도 스폰서하고 있으며, 종종 직접 마차를 몰고 대회에도 참가한다. 얼마 전에는 무려 76마리의 말로 마차를 끌어 기네스북에 오른 적도 있다.

외교관 미셸 라츠첸코와 플루티스트 마크 그로웰의 로프트 하우스
 
외교관 미셸 라츠첸코 가족.
 
브뤼셀 외곽에 자리한 외교관 미셸 라츠첸코(Michel Lastschenko, 53)의 집은 공장을 개조해 거듭난 로프트 하우스(Lofts House)다. 내력이 깊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1800년대의 계단이 3층까지 이어져 있다. 본래 6층짜리였던 이 공장은 현재 위에서부터 3개 층이 미셸의 집이고, 아래 3개 층은 다른 사람이 산다. 처음에 이 곳은 밀가루를 만들어 파는 제분공장이었다. 1852년에 처음 공장이 세워졌고, 1906년에는 용도가 바뀌어 초콜릿을 만드는 공장이 되었다가 1929년에는 고무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198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다 1984년에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 아직도 건물의 외관만 보면 그 안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곳이다.
 
미셸의 5층 작업공간.
 
그가 이 공장을 얻어 리노베이션을 하고 집으로 만들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7년 전이다. 애당초 천장이 높고, 실내가 넓었던 공장의 공간은 집의 공간을 이리저리 비틀고 구획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가 사는 집은 4층에 거실과 주방을 두고, 4층과 5층 간의 천장을 없애 보다 높고 널찍한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거실 동편에는 테라스가 있어서 집의 숨통을 틔워주는 노릇을 하는데, 여기에서 높이 치솟은 공장 굴뚝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볕이 잘 드는 곳이라 일광욕을 즐기기에도 맞춤한 공간이다. 5층에는 부부의 침실과 딸의 침실이 있고, 서재가 따로 떨어져 있다. 4층과 5층이 하나인 듯 둘로 나눠진 공간이라면, 아들의 방과 작업실이 자리한 6층은 완전히 독립된 공간을 선보인다. 5층에서 좁고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 만나는 6층은 한마디로 아들에게 딱 맞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아직 20대 초반인 아들은 뉴욕 필름 아카데미에서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배우고 직접 감독을 맡아 제작까지 하는 미래의 필 잭슨이다. 그는 영화에 쓸 소품과 ‘스페이스’도 직접 제작하고 있는데, 그의 방이 바로 영화사이자 제작사이고 소품실이나 다름없다.
 
미셸 부부의 침실(위)과 주방의 차주전자 장식(아래).  
 
무엇보다 미셸의 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다양한 나라에서 가져온 다양한 수집품이다. 그의 집에 들어서면 곧바로 만나는 것이 파키스탄에서 온 오래된 문기둥이다. 파키스탄의 목조각 불상도 거실의 장식품으로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의 사원 장식품도 벽에 걸려 있고, 주방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져온 수많은 차주전자가 진열돼 있다. 중국의 오래된 가구와 도자기, 콩고의 화려한 옷감, 르완다의 민속공예품, 러시아 인형들도 여기저기 그의 거실을 장식하고 있다. 또한 거실의 빈 구석마다 모던한 그림이 걸려 있는데, 대부분 프랑스의 로제 오르제(Rose HolZer) 작품이다.
 
미셸의 막내 딸 방에서 내다본 브뤼셀 풍경.
 
외교관인 미셸은 파키스탄에서 3년을 있었고, 러시아에서 5년, 콩고에서 4년을 보냈다. 아프가니스탄과 르완다, 덴마크, 우크라이나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이렇게 세계를 떠돌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는 다양한 나라의 공예와 조각품을 모으는 콜렉터가 되었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의 기후와 음식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즐기게 되었다. 그의 아내 캐서린도 처음에는 불만이 있었으나, 이제는 각국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둘은 대학 때 만나 결혼했는데, 아내 캐서린의 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였다. 집안에 걸려 있는 로제 오르제의 작품은 순전히 ‘화가의 딸’인 아내가 고른 작품이고, 집안의 전체적인 데코레이션도 대부분 아내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플루티스트 마크 그로웰.
 
과거 유럽에서는 로프트 하우스가 예술가의 전유물이었다. 화가나 음악가, 시인과 같은 창작의 고통과 환희를 즐기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득 채우거나 생산해내는 ‘공장’이나 ‘창고’는 그 자체로 창작과 예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로프트 하우스는 더 이상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좀더 독창적이고, 좀더 자유로우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일반인들도 즐겨 로프트 하우스를 찾기 때문이다. “과거 환경을 망가뜨리던 공간이 이제는 환경을 생각하는 대안이 되고 있습니다.” 외교관 미셸의 말이다.
 
       
마크의 서재(위왼쪽)와 플룻(위오른쪽). 주방공간(아래).
 
플루티스트 마크 그로웰(52, Marc Grauwels)의 집도 로프트 하우스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 죠엘(28)과 함께 브뤼셀 마두역 인근에 산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이 곳은 와인 창고였고, 1900년대 후반까지도 이 곳은 그저 브뤼셀 외곽의 평범한 창고에 불과했다. 그러나 7년 전 마크 그로웰이 이 공간을 사 집으로 개조하면서, 집안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마크가 사는 3층 공간 전체가 감각적인 생활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오피스텔처럼 탁 트인 공간의 활용도 재미있다. 벽 양쪽에 계단을 두어 두 개의 누각 공간을 만들었는데, 한쪽은 작업실이고, 한쪽은 침실이다. 공간의 한가운데는 서재이고, 오른쪽은 피아노, 왼쪽은 주방이며, 주방 앞에 방처럼 꾸민 유일한 공간이 욕실이다.
 
 
본래 공장이었던 바, 천장이 높은 것을 제대로 활용한 공간 배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된 벽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옛날 벽돌을 오히려 그대로 두어 오래된 느낌과 친근함을 강조한 것이다. 마크 그로웰은 벨지움에서 꽤나 알아주는 플루티스트이고, 공연 수입도 넉넉한 편이지만, 그는 애당초 모던하우스를 짓고 살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애당초 브뤼셀에는 중세시대에 지은 건물이 상당수이고,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 짓는 것 자체가 대부분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그런 건물의 내부 개조는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브뤼셀을 비롯해 벨지움의 대도시에서는 로프트 하우스가 어쩔 수 없는 유행이 되고 있다.

컨설턴트 카린 호스티의 솔루션 하우스(Solutions House)
 
카린 호스티의 모던 하우스.
 
어트벨드(Ertvelde)에 사는 카린 호스티(karin Hoste)와 패트릭 리버트(Patrick Lybaert) 부부는 경영컨설턴트(Solutions)와 컨설팅 스크립터로 일하고 있다. 남편은 유럽이나 미국 전역을 돌며 일하고, 아내는 남편이 하는 일을 도와 스크랩도 하고 강의 원고도 써준다.  이들이 사는 집은 독특한 공간 배치가 눈에 띈다. 1층은 살림집인데, 복도를 나눠 한쪽은 부부가 살고, 다른 쪽은 부모님이 산다. 복도 끝에는 삼면의 벽이 온통 통유리로 된 널찍한 거실을 두고 있다. 애당초 이 거실은 아침 저녁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을 모두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카린의 열린 공간,거실.
 
이는 바깥의 자연빛을 최대한 집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구상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바깥의 변화무쌍한 자연과 풍경을 안으로 들이고, 거침없는 실내를 밖으로 내보내려는 카린 호스티의 컨셉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밖에 것은 안으로, 안에 것은 밖으로. 거실에서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부부가 일하는 솔루션 사무실이 나온다. 단 2명이 일하는 공간이지만, 사무실은 거실만큼이나 넓고 한쪽 벽은 캐비닛이 필요없는 수납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무실 공간은 탁 트인 통유리 너머의 자연과 그 풍경을 끌어들이는 거실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도록 해 시야의 답답함을 해결했다.
 
주방(위)과 식탁(아래). 
 
2층에서 다시 계단을 올라 3층으로 올라가면 게스트룸과 선텐실이 자리해있다. 컨설턴트가 직업인 남편의 손님이 워낙 많은 편이어서 따로 게스트룸을 두었다고 한다. 물론 선텐실은 순전히 집안의 여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집안에 선텐실을 따로 두었을 정도로 이 집은 애당초 여자의 손에서 탄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공간 배치는 카린 호스티가 직접 1년에 걸쳐 구상한 것이며, 설계의 밑그림이 되는 디자인만도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사실상 건축가는 시공만 맡았을 뿐이다. 대체로 건축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유럽의 경향과 달리 집주인이 구상에서부터 설계의 밑그림까지 세심하게 신경쓴 맞춤형 집인 셈이다.
 
거실에서 2층 사무실로 올라가는 계단.
 
집주인의 취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구와 소파는 물론 벽에 걸린 대부분의 장식물까지 손수 핸드메이드로 제작해 집을 꾸몄다. 전체적으로 집은 ‘스틸+스톤’을 뼈대로 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나무나 시멘트 대신 스톤카펫을 깔아 단조로움과 밋밋함을 보완했다. 아무래도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층층마다 서로 다른 구조와 공간 배치에 있다. 개인공간과 사무실, 게스트룸은 서로 분리된 듯 연결돼 있으며, 통하면서도 각기 다른 나뉨을 지닌다. 이 통합과 분리의 접점 노릇을 하는 곳이 바로 거실이고, 거실을 둘러싼 통유리가 단절된 안과 밖을 서로 넘나들게 하면서 집을 숨쉬게 하는 것이다.

화가 마르셸 메이어의 ‘숲속의 집’
 
화가 마르셸 메이어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마르셸 부부가 다정하게 걷고 있다.
 
겐트에서 좀 떨어진 생 마르탱 라텡(Sint-Martens Latem) 마을은 1800년대 초부터 시인과 화가들이 많이 거주해 일명 ‘예술가 마을’로 불려왔다. 화가 마르셸 메이어(Marcel Maeyer, 87)는 43년 전인 1963년 바로 이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예술가 마을답게 풍경이 그윽하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탓에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마을에 발을 들여놓던 시절만 해도 여긴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외진 곳을 골라 땅을 사서 집을 지었는데, 그 때는 이 집이 근처에서 보기 드문 최신식 모던 하우스였답니다.” 당시의 모던 하우스는 40년 넘는 세상의 풍파를 견디면서 이제는 어느덧 손때 묻은 집이 되었지만, 그동안 노화가의 작품 산실 노릇을 해온 것만은 분명하다.
 
마르셸 메이어의 숲속에 묻힌 집.
 
그의 집으로 가기 위해선 멋진 포플러나무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이 포플러 터널은 큰길에서 그의 집까지 거의 100여 미터나 이어져 있는데, 그곳을 지나 노화가의 집으로 가는 일은 마치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그림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다. 바람이라도 불면 누렇게 물든 포플러 잎들은 잘랑잘랑 은전 흔드는 소리를 낸다. 포플러 터널이 끝나는 곳에 ‘그림같은 숲속의 집’이 있고, 키 큰 상수리나무와 은회색 자작나무와 무성한 갯버들이 호위하듯 노화가의 집을 에둘렀다. 집 주변은 마치 잔디가 깔린 듯 마른 이끼가 뒤덮여 있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푹신한 융단을 밟는 기분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소라형 계단(위). 마르셸의 그림이 걸린 거실(아래). 
 
“이 나무들은 43년 전 여기로 들어오기 전에 심은 것들인데, 저렇게 컸습니다. 아무래도 집을 에둘러 흐르는 물길이 땅을 기름지게 하는 모양입니다.” 그는 2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이 숲의 주인이다. 집을 지으면서 나무를 함께 심은 것이 오늘날 그의 집을 그림같은 숲속의 집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자연에 파묻혀 살면서도 그의 그림은 자연이 아닌 사회와 사람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어떤 그림을 그립니까?”라고 질문하자 그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폴리티칼 이슈(Political Issue)”라고 대답했다. 의외의 대답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실과 거실에서 첩첩이 포개진 그의 그림을 하나하나 꺼내보다 보면 그가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알게 된다. 그는 리얼리즘에서 말하는 거창한 ‘폴리티칼 이슈’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사회에 던져진 외로운 군중과 버려진 사랑과 가족의 복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르셸 숲속의 집 주변의 전원 풍경.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열 살 무렵이다. 어언 그림 경력도 70년이 다 되어 가는 셈이다. 5년 전 독일에서 개인전을 연 뒤로 이제껏 그는 숲속의 집에서 두문불출 그림만 그려왔다. 아직 전시회 일정은 잡히지 않았지만, 그는 개인전에 선보일 작품을 하나하나 거실에 쌓아놓고 있다. 그의 거실은 거의 개인 전시실에 가깝다. 거실 뒤편으로는 그가 ‘실험실’이라고 부르는 작업실이 붙어 있는데, 거기에는 여전히 그리다 만 그림들로 가득하다. 할머니 가브리엘에 따르면 그가 아직도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70년 동안 그림을 그렸어도 그의 작업은 아직 스스로에게 실험이고, 모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