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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보물’ 넘치던 천년왕도 영광 다시 꽃피는듯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3> 동서문명의 접합지 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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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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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유서깊은 도시다.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기 위해 만든 누각인 종루의 야경이 화려하다. 종루 아래에서는 거리 음악회도 열려 밤늦도록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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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을 떠나 시안으로 순항하던 비행기 안에서 착륙 20여분을 앞두고 기내방송이 울려나왔다. 갑작스런 소나기 때문에 쩡저우로 회항한다는 것이다. 기내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가끔 당해본 사람들은 그런대로 느긋하지만, 초행자들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쩡저우 공항에 착륙하자 뒷좌석에 앉은 60대 라틴아메리카 승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박수를 치자 다들 따라 박수를 쳤다. 사실 1950~60년대엔 비행기가 안착만 하면 승무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게 상례였다. 예정보다 3시간 늦게 시안에 도착했다.
어둠이 깔린 공항을 빠져나와 얼마쯤 달리자 용광로에서 뽑아낸 쇳물처럼 몇 줄기 불빛이 어디론가 아득히 뻗어간다. 중국이 야심차게 추진중인 이른바 ‘서북 대개발’의 첫 역사로 건설한 시 외곽 순환도로와 하서회랑 쪽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가로등이라고 한다. 시안을 기점으로 한 ‘서북 대개발’의 일환으로 닦은 저 고속도로는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크로드 재발견’일 수 있다. 시안은 일찍부터 동서문명의 접합지로서 오아시스 육로가 동서로 뻗어간 기점이었고, 오늘날 그 삭막했던 길 위에 화려한 고속도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시안의 고속도로는 21세기 우리의 ‘실크로드 재발견’일 수 있다
관중평야 한복판에 자리잡은 시안의 역사는 신석기시대 반파(半坡) 마을에서 시작된다.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2세기께 서주 왕조는 서북쪽 근교인 주원(周原)에 도읍을 정했다가 서남쪽 호경(鎬京)으로 옮겼다. 전국시대 말엽 진나라가 근교 함양을 수도 삼았다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부호 12만을 이주시켜 저 유명한 아방궁을 짓는 등 거대 도성으로 축성했다. 그러다 한나라 때에 와서 지금 시안에 도읍을 정하고 이름도 ‘자손들이 영원히 평안하기를 바란다'(欲其子孫長安)는 소망을 담아 ‘장안’이라고 지었다. 장안이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수·당 때부터다. 수 문제는 전대 왕조인 북주의 흔적을 씻어버린답시고 옛 수도는 몽땅 쓸어버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 크게 흥할 것이란 뜻에서 ‘대흥성'(大興城)을 새로 지었다. 그런데 성을 지은 사람은 서역 출신의 우문개(宇門愷)여서, 오늘날 장안성에는 어딘가 모르게 서역적 요소가 섞여 있다. 수나라를 계승한 당나라는 이름만 장안성으로 고치고 계속 증수·확대해 크기나 아름다움 면에서 단연 굴지의 세계도시를 만들었다.
1100년간 11개 왕조 도읍에서 상공업 도시로
8세기 당나라 최성기 때, 장안은 길이 37㎞의 성곽에 84㎢의 면적을 지닌 거대 도시로서 인구는 무려 100만에 이르렀다. 너비 150~170m에 이르는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뻗었고, 시가지는 바둑판 같은 110개의 방(坊)으로 구획되었다. 시가지는 황궁에 이르는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구와 서구로 양분되었다. 거기에 각각 동시와 서시라는 시장이 섰는데, 시장마다 ‘진기한 천하 보물이 다 모인다’는 200여 점포가 모여 있었다. ‘밤낮 시끄럽고 등불이 꺼질 줄 모르는’ 야시장도 즐비했다. 특히 서시는 오아시스로를 통해 들어온 서역 상인들로 밤낮없이 붐빌 뿐 아니라, 서역의 노래와 춤, 옷과 먹거리가 판을 쳤다. 이를테면 호풍(胡風) 일색이었다. 여기에 더해 가로수와 대나무 숲이 우거지고, 곡강지(曲江池)나 화청궁 같은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경관들이 장안을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
대도 장안의 영화는 현종 때 안녹산의 난과 당말 농민전쟁 등으로 빛이 바래 더는 도읍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영광의 자취가 하루아침에 사그라진 것은 아니어서 14세기 초 이곳을 찾은 마르코 폴로의 눈에는 여전히 ‘지극히 장엄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비쳤던 것이다. 오늘날 시안성은 14세기 말 명나라 때 수축한 것이며, 이때 이름도 ‘시안’으로 바뀌었다.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1100여년 동안 11개 왕조의 도읍지로 자리를 굳혀온 고도 시안은 지금 인구 660만을 헤아리는 산시성 성도이자, 서북지방의 최대 상공업 도시로 새 번영기를 맞고 있는 성싶다.
고대 기독교의 한반도 전파 알려주는 비석도
흔히들 시안(장안)을 실크로드 동쪽 끝, 혹은 출발지로 알고 있다. 조선족 안내원은 그 증거물이 있다면서 우리를 옛 서시터로 안내했다. 복잡한 길 한가운데 자그마한 거리공원 비슷한 곳에 나지막한 개원문(開遠門)이 세워져 있다. 개원문이란 ‘먼 길 떠나는 시작을 알리는 문’이란 뜻이다. 문에 들어서면 낙타 등에 짐을 가득 싣고 서쪽으로 길 떠나는 대상을 형상화한 ‘실크로드 기점 군상’이란 석조물이 나타난다. 고행길이지만 7월의 석양볕에는 생기가 감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거나, 조형물만 보면 영낙없이 시안을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착각하게 된다. 시안은 동서문명의 접합지라는 입지조건 외에, 실크로드 개척과 얽힌 숱한 연고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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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교 사원인 시안 칭전대사 옆 시장에서 이슬람 복장의 여주인이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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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한나라 무제는 숙적 흉노를 동서에서 협공하려고 멀리 서쪽으로 장건을 파견한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까지 쫓겨간 월지와 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그가 오간 길은 오아시스 육로의 남·북도다. 장장 13년이 걸린 장건의 1차 서역사행을 역사에서는 ‘서역착공'(西域鑿空), 즉 서역길의 개척으로 본다. 사실 이 서역착공을 계기로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한 오아시스 육로가 사상 처음 뚫렸으며, 그 시발점은 수도 장안이었다. 그래서 당대까지 개척된 오아시스로의 남·중·북도의 기점도 모두 장안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와 더불어 동서문명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여러 유물들은 요로에 자리잡은 시안의 위상을 더욱 드높였다. 중국 최대의 ‘석조문고’라는 비림(碑林)은 말 그대로 비석으로 숲을 이룬 박물관인데, 여기에 역대 명필들의 글을 새긴 석비 1095기가 소장되어 있다. 그 중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2호실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다. 781년 세운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유물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전파상을 알려주는 보물이다.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됐다는 돌십자가와 발해 유적에서 나온 협시보살의 십자가상 등 국내 고대 기독교 관련 유물은 경교의 동방 전파와 관련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동전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 여사는 1917년 이 비의 모조품을 금강산 장안사 경내에 세우기도 했다.
진시황릉∼병마용 세계 최대 박물관 설계
비의 의장이나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동서문명간 융합의 흔적들이다. 의장에서 보면, 비는 상부와 비신, 좌대로 구성된다. 상부는 용이 큰 여의주를 받쳐들고, 그 바로 밑에 십자가가 연꽃과 뜬구름 속에 새겨져 있다. 이것은 기독교(십자가)와 더불어 불교(여의주)와 도교(뜬구름)의 요소가 섞였음을 말해준다. 내용 면에서도 다른 종교와의 융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적지 않은 교리적 개념들이나 용어들을 불교나 유교, 도교에서 빌려다 쓰고 있다. 예컨대, 하느님을 건(乾), 종교를 법, 주교를 법주, 구원을 제도, 사원을 법당이라고 칭하는 식이다. 또 박물관 5호실에는 최근 시안 역 공사 때 발굴된 보살상 한 점도 전시중인데, 목걸이·복식 등으로 미루어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초기 간다라상임이 틀림없다.
서방 종교의 동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슬람교다. 그래서 땅거미 질 무렵이지만 시안 칭전대사(淸眞大寺)를 찾았다. 8세기 중엽 세워진 이 사원은 이슬람 사원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미어자나’(예배 시간을 알리는 첨탑)나 반구형 돔이 따로 없는 중국 전통식 건물이다. 저녁 예배 시간이 되자 신도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데, 15년 전에 비해 젊은이들이 더러 끼여있는 것이 달라진 모습이다.
시안은 동서문물 집산지이고 교역장일 뿐만 아니라, 동서양인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가장 번성했던 당대에 동서양 각지를 드나든 사신이나 상인, 승려, 유학생, 연예인 등 이른바 ‘교류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눌러앉은 외방인들도 부지기수였다. 안녹산을 비롯한 번장들이나, 시선 이백, 양귀비 같은 위인들도 서역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시안은 동서문명을 한곳에 아우른 거대한 박물관이다. 중국 당국은 지금 교외의 진시황릉과 거기서 1500m 떨어진 병마용 박물관까지 합쳐 외성이 6.2㎞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박물관을 세울 계획을 짜고 있다고 한다. 모양새를 어떻게 갖추든, 분명한 것은 시안이 오아시스로의 중요 길목에 자리잡은 동서문명 접합지일 뿐, 결코 길의 동쪽 끝이거나 출발지는 아니란 점이다. 이를 반영하듯, ‘파수절류'( 水折柳)와 ‘위수절류'(渭水折柳)란 말이 전해온다.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파수 가에서,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위수 가에서 버드나무를 꺾어 둥근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고사다. 고리를 뜻하는 한자 환(環)은 ‘돌아오다’는 뜻의 환(還) 자와 발음이 같으므로 빨리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은 작별인사가 된다. 이처럼 시안은 길의 끄트머리가 아니라, 길손들이 동서로 떠나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안이 한반도를 포함한 그 이동의 여러 지역, 나라들과 오아시스로를 통해 교류를 지속했음을 감안하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해진다. 통념은 자칫 눈을 멀게 하는 법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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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세기 풍미한 ‘호풍’ 지금도 밤시장 밝혀
서안과 서역문화
‘어디서 그대와 이별할까/ 장안의 동쪽 문인 청기문이네/ 술집의 호희(서역의 무용수)는 하얀 손 내밀어/ 손님을 잡아끌고 금준(야광술잔)으로 취하게 만드네’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은 ‘송배십팔도남귀숭산’이란 한시에서 장안을 휩쓸었던 당시 서역문화 열풍을 이렇게 빗대었다. 〈신당서〉 〈구당서〉 등의 중국 역사책을 보면 7~9세기의 장안 시내는 어디서든 쿠처·투루판, 소그디아나, 이란 등의 중앙·서아시아에서 온 호인(胡人)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실크로드 교역을 주도한 소그드 상인들은 악기, 약품, 향료, 융단 등의 희귀품을 낙타 행렬에 싣고 들어와 서시에서 장사를 했고, 만명에 육박하는 이란, 투르크 사람들은 도심 곳곳에 집단촌을 이뤄 살았다. 이들이 가져온 서역의 이국적이고 세련된 의식주 문화는 왕실 귀족과 재산가들의 넋을 빼앗아 이른바 ‘호풍'(胡風)이라는 실크로드 문화를 100년 가까이 유행시켰다.
복식제도를 다룬 〈당서〉의 ‘여복지’를 보면 개원 연간인 8세기 초 이후 서역인들의 호모(모자), 호복(옷), 호극(신) 등이 유행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잘나가는 귀족 젊은이들은 서역풍 모자와 옷을 입고서 온종일 성안팎을 거닐다 서역 무희가 기다리는 술집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일과였다고 전해진다. 유병, 호병, 탑납 따위의 이란풍 음식류와 ‘호주’로 불리는 투르판산 서역 포도주, 회오리춤으로 극찬받은 호선무와 쿠처악 따위 서역칠조 등이 도성 안에 널리 퍼졌다. 9세기 이후 황소 등 빈번한 수도 침탈로 장안의 서역문화는 스러져 갔다. 하지만 그 흔적은 오늘날도 남아 칭전대사 주위에는 중국 신장 출신의 무슬림 이주민들이 차린 휘황찬란한 바자르(밤시장)가 성업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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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게 장식한 집’…문명 파괴의 증언장 |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9> 베제클리크 석굴의 수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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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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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루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산 절벽에 벌집처럼 굴을 뚫어 만든 ‘토욕구 천불동’의 전경. 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강 양쪽에 94개의 석굴이 있는데 베제클리크와 마찬가지로 내부 유물은 심하게 파괴된 상태다. 지난해 말부터 개방돼 아직 탐방객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중국 당국은 아직 모든 동굴을 열지 않을 뿐더러 사진 촬영도 막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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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탐사를 다니다 보면 자주 파괴된 유물·유적과 맞닥뜨리게 된다. 풍화나 지진 등에 따른 자연적 파괴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일부러 자행한 유물 파괴는 반문명적 작태로서 ‘반달리즘’, 즉 문명파괴 행위라고 한다. 그런데 파괴자들은 얄궂게도 ‘구제’ ‘보존’ ‘보편적 가치’니 하는 감언이설로 자신들의 범죄를 감싸면서 사죄는커녕 편취해 간 유물들마저도 돌려주지 않으려고 갖은 앙탈을 부린다.
유적 분포밀도에서 단연 손꼽히는 투르판은 문명파괴 행위의 처절한 증언장이다. 그 중에서도 베제클리크(柏孜克里克) 석굴은 가장 극명한 현장이다. 석굴은 불꽃처럼 산세가 천변만화하는 투르판 외곽의 화염산을 끼고 30분쯤 달려가야 나온다. 산기슭을 가로 질러 무르툭(목두구·木頭溝) 계곡에 이르면 푸르죽죽한 나무로 뒤덮인 계곡 한복판에 물이 흐르고, 멀리 텐산산맥의 만년설이 한눈에 안겨오는 풍경과 만나게 된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의 서쪽 벼랑 중턱에 벌집처럼 뚫린 굴들이 송송히 보이는데, 바로 위구르 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란 뜻의 베제클리크 석굴이다.
불상은 온데간데 없고 벽화 속 불상의 눈은 몽땅 도려내어졌다
입구 광장에서 계단을 타고 10여m 내려가니 절벽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늘어선 석굴들이 나타난다. 지금껏 발굴된 석굴은 83 개로, 그중 벽화가 일부라도 남은 것은 40여 개뿐이다. 굴을 만든 때는 6세기 국씨 고창국시대부터 7세기 당·서주시대를 거쳐 13세기 원나라 때까지인데, 전성기는 10세기를 전후한 회골(回##骨+鳥:위구르) 칸국시대다. 석굴은 파라미어와 서하어, 위구르어 등으로 쓰여진 숱한 불경 사본과 여러 시기에 그려진 천불도를 소장한 불교문화의 보고다. 특히 왕가 전속 사원이 된 회골 칸국시대의 공양상과 경변도(經變圖), 보살도 등은 장엄의 극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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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구르어로 베제클리크는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란 뜻이다. 무르툭계곡의 깎아지른 협곡의 서쪽에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곳이 석굴이다. 서구 도굴꾼들로 인해 석굴 안의 유적들이 파괴된 까닭에 지금은 내부 촬영조차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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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의 보고…장엄의 극치
석굴은 마니교 연구자들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 고비사막 북쪽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9세기 중엽 고창(투르판)으로 옮겨와서 신봉하던 마니교를 퍼뜨렸는데, 그 생생한 자취가 여기에 남아 있다. 석굴에는 위구르어로 쓴 마니교 경전이 보전되어 있고, 삼신광명수(三身光明樹) 같은 마니교 성수가 그려져 있으며, 마니동상(높이 9㎝)도 발견되었다. 그밖에 금동불상(높이 37㎝)과 불탑지, 황동대야, 각종 자기그릇, 어린이 놀이 그림(48굴), 밭에서 소먹이는 그림, 악기 연주도, 용의 비상도, 비천도 등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어 당시 종교 생활상과 교류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어이없게도 이들 유물 대부분은 제자리에 없고,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 박물관에 뿔뿔이 흩어졌다. 엄격히 말하면,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기 위해 후세에 남겨진 참유물(遺物)이 아니라, 무연고지로 흘러가 변조된 ‘유물(流物)’이고 편취된 장물(臟物)일 따름이다. 이제 우리가 둘러본 여섯개 굴에서 그 속내평을 한번 드러내 보자.
처음 들어간 17굴부터 만신창이다. 원래 전면에 커다란 불상이 각각 좌우로 3좌씩 있었는데, 온데간데 없고 광배 자리만 남아 있다. 천정 벽화도 거의 뜯겨 벽화 속 불상들의 눈은 몽땅 도려내어졌다. 20굴은 회골 칸국시대 공양상으로 유명한 굴이다. 문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정방형의 중당이 있고, 그 주위에 좁은 회랑이 둘러있는데, 그 좌우벽에 서원을 주제로 한 왕이나 왕후, 귀족들의 공양도가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공양상마다 한문이나 위구르어, 산스그리트어로 방제(榜題: 제사받는 사람의 이름)가 쓰여져 있었는데, 지금은 떼어간 자리들만 휑뎅그레 남아 있다. 독일인 폰 르콕이 20세기 초 뜯어가 독일 베를린 박물관에 두었는데, 이 마저도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상당수가 불타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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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쇄회로와 경비원들의 감시 속에 간신히 찍은 베제클리크 33호굴의 벽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기 위해 각국에서 온 100여명의 왕자들이 도열한 장면인데, 신라 왕자로 추정되는 인물도 보이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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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골 칸국의 후기 동굴벽화에 속하는 27굴은 내용상 앞의 20굴과 비슷하다. 역시 르콕의 분탕질에 걸려 텅 비다시피 되어버렸고 소조불상들의 눈도 성한 데가 없다. 게다가 무지한 현지인들이 청소한답시고 물로 알카리성 황토벽을 씻어내리다 벽이 그만 거무튀튀하게 변색되고 말았다. 31굴에는 동벽에 배를 타고 피안으로 가는 석가의 본행경도(本行經圖)와 열반경변도, 공양도가, 불단 정면에는 회골 칸의 공양도가, 서벽에는 복식 세밀도가 그려졌으나 지금은 거지반 없어졌다. 남은 부분은 뜯어가지 못하게끔 흙으로 덧칠해놓았다고 하니 심보가 얼마나 고약한가. 벽면 곳곳에 송곳으로 긋거나 갈퀴로 긁은 자국이 역력하고, 지금은 4장의 사진만 떼어간 자리에 오도카니 붙었다. 33굴 뒷벽에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는 그림이 있는데, 아랫 부분은 없어지고 윗 부분만 남아 있다. 그림의 좌측에는 보살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 호법신들이, 우측에는 각국에서 온 100명의 왕자들이 도열해 있다. 왕자들의 눈만은 온전히 남았다. 마지막 굴인 39굴에서도 벽 한채를 아예 통째로 떼어갔는가 하면, 제단 속을 파헤치다가 아무 것도 없으니 그냥 되묻은 흔적도 보였다. 둘러보지 않은 나머지 굴들의 상황도 대채로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파괴 선봉 독일인 르콕과 반달리즘
이처럼 베제클리크 석굴은 2중 3중으로 인위적 파괴를 당했다. 그것도 문명을 외치는 현대인들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그 첫 장본인은 르콕을 비롯한 독일인들이다. 1902년부터 1914년 사이에 독일은 네 차례에 걸쳐 ‘탐험대’란 이름의 도굴꾼들을 투르판에 투입했다. 첫 탐험대는 베를린 민속학박물관의 인도부 부장 그룬베델을 대장으로 한 3명이었다. 대무기상 크루프의 막대한 재정지원을 받던 그들이 예비조사에 불과했던 첫 탐험에서 46상자나 되는 유물을 챙겨오자 횡재의 꿈은 부풀었다. 급기야 황제와 크루프의 후원을 받는 재단이 설립되고 장기 탐험을 주관할 전문위원회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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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욕구 아래 마을에 있는 독일인 탐험가 르콕의 집. 베제클리크 입구에도 르콕이 머물던 집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는 투투판 일대에 10년간 머물며 수많은 유물을 파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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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베델의 건강이 악화되자 위원회는 2차 탐험대장에 르콕을 임명한다. 베를린의 부유한 포도주 판매상 아들로 태어난 르콕은 영국과 미국을 전전하다 베를린 동양언어학원에서 아랍어, 페르시아, 산스크리트어 등의 동양어를 배운다. 마흔 두 살 때 처음 민속박물관에 무보수 견습생으로 채용된다. 그러다가 행운의 기회를 잡은 그는 1904년 9월 투르판으로 향한다. 그의 저서 <사막에 묻힌 중국령 동투르키스탄의 유물들>에는 이때의 행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책을 보면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중국 국경 부근에 도착한 그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러시아 영사의 말을 듣고 금화 1만 2천 루블을 넣은 주머니 위에 앉아 라이플 권총을 한손에 든 채 우루무치까지 간다. 약 두달 뒤인 11월18일 투르판의 카라호자에 도착해 약 4달간 머물면서 베제클리크 석굴을 비롯한 유적지들에서 유물 편취에 몰두한다. 베제클리크 석굴 밑 강가와 멀리 토욕구 석굴로 들어가는 어귀에 그가 머물었던 집터가 있다. 그는 10년간 하미에서 카슈가르에 이르는 신장 전역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다.
‘실크로드의 악마들’ 그리고 홍위병
르콕을 비롯한 2차 탐험대는 103상자분의 유물을 뜯어갔고, 그후 그룬베델이 합류한 1905~7년의 3차 탐험에서는 128상자의 유물을 또 가져갔다. 르콕은 노획한 ‘기적의 전리품’에 대해 후일 양심의 가책도 없이 덤덤히 ‘성공담’을 회상하고 있다. “오랜 시간 힘들여 작업한 끝에 벽화를 모두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20개월 걸려 그것들은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벽화들은 박물관의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르콕은 극단적인 문명파괴자였다. 애당초 학자도 탐험가도 아닌 그가 무기상의 재욕(財慾)에 놀아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제클리크 석굴에서 벌어진 르콕의 반달리즘적 행태는 앞다퉈 실크로드 곳곳의 유적을 짓뭉개고 유물을 뜯어간 다른 편취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지의 도굴꾼들이 투르판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일원에서 가져간 유물들은 유럽과 미국의 30여 개 박물관에 지금껏 ‘유물(流物)’로 유폐되어 있다. 그 과정은 낯뜨거운 질투와 모해의 연속이었다. 영국의 스타인은 늘 경쟁자들을 조소하면서 독일인들은 ‘항상 떼거리로 사냥하러 다닌다’고 비난했다. 독일과 러시아간에는 유적 발굴을 둘러싸고 무력충돌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의 피터 홉커크는 저서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이들 탐험가들을 겨냥해 듣기에는 좀 섬뜩하지만, ‘악마들’이라고 일침한다.
석굴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민간신앙에 현혹된 일부 무슬림들은 불상의 눈을 모든 재앙의 근원인 이른바 흉안(凶眼: 아이눈 랏마)으로 착각한 나머지 통째로 도려내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60~70년대 중국땅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홍위병의 난동 또한 문명파괴에 대한 단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 무모한 도굴꾼들과 파괴자들에 의해 뜯기고 찢기어 텅빈 헛간처럼 변한 현실 앞에서 울분과 허탈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되돌렸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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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오타니 컬렉션’
승려 탐험가 오타니 조선총독부 기증 고양보살상 등 투루판 명품만 600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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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제클리크 15굴의 공양보살상. 눈이 파괴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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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인지 불행인지 숱하게 털린 투르판 보물들의 상당수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박)에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물려받은 것인데, 보통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한다. 스타인·르콕 등과 더불어 20세기 초 실크로드를 답사했던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1876~1948)와 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 조사 끝에 수집한 유물들 중 일부다. 오타니는 탐험 뒤 재정난에 시달리자 구하라란 상인에게 유물 일부를 팔았고, 구하라가 1916년 이를 다시 총독부에 기증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중앙아시아실에 전시중인 투르판 유물들은 오타니 컬렉션 소장품(1500여 점) 가운데 40%로 가장 많다. 베제클리크, 토욕구 등 석굴 벽화 조각들과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생활유물들이 주종인데,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9~12세기 투르판을 지배한 위구르인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는 서원화들과 마니교 관련 회화들의 가치는 지대하다. 서원화는 중앙부의 큼직한 과거불 앞에서 위구르족 상인, 왕 등이 미래 성불하겠다는 서약을 바치는 그림인데, 투르판이 중세 동서교역 중심지로 큰 재력을 쌓으며 번영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베제클리크 15굴에서 절취해온 10~12세기 공양보살상의 경우 열다섯 주제 서원화의 조각 그림인데, 가장 아름다운 서역 보살상으로 첫손꼽힌다. 민병훈 학예관은 “안목 높은 학승들이 교리상 중요한 벽화 모티브를 골라 뜯어왔기 때문에 소장 벽화들은 미술사적 의미가 특출한 명품들”이라고 말한다.
아스타나 고분 출토품들은 한인 왕조인 국씨 고창국 시대의 유물들로 묘표,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 직조유물 등 다양한 부장품들을 망라한다. 중국·서역 문화가 지역 특색에 맞게 교류·융합된 양상을 대변하는 기준 유물이란 점이 주목된다. 특히 무덤 천정에 붙였던 중국 신화의 창조신 복희와 여와의 삼베 그림은 채색이나 구도 등이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유명하다. 이밖에 카라호자에서 출토된 13~14세기께의 꽃무늬 바구니도 이후 출토사례가 보고되지 않은 희귀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우리가 박물관에서 수시로 보는 투르판 유물들 또한 반달리즘의 악몽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유물들 대부분은 오타니 탐험대의 3차 조사 주역인 절집 사무라이(무사) 출신의 요시카와가 보물찾기하듯 털어온 것들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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