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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미녀가 누구인가?”

별을 그리다 2009. 2. 27. 13:16

세계 3대 미녀가 누구인가?”

 

이런 질문처럼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이 없다. 도대체 동서양, 남북반구, 아프리카 중동 전 세계 많은 여성들, 그것도 과거에서부터 현대까지 아마도 수 천 억 명을 넘어 수 조 명에 이를 여성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성 3명을 꼽으라니?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 답부터 들어보자. 그 답은

 

클레오파트라, 양귀비, 그리고 오노노 고마치란다.

 

오노노 고마치

 

이 대답을 보고 우리는 그러한 질문을 하고 해답을 가르쳐 준 나라가 적어도 중국 아니면 일본이란 생각이 들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 질문이 서양에서 나왔다면 양귀비나 오노노 고마치 라는 이름 대신에 트로이 전쟁의 미인 헬렌이라든가 다른 서양 이름이 들어갔을 것이고, 만약 중국이라면 굳이 잘 모르는 일본 여성보다는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에 미인계를 썼던 서시, 흉노에 가게 된 비운의 왕소군, 역시 미인계의 수단이 된 초선 등의 이름이 등장할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3대 미인이란 말은 없고 흔히 4대 미인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방금 인용한 세 명 외에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양귀비가 들어갈 터이다. 그렇게 따지다보면 이 질문을 하고 답을 가르쳐주는 나라는 일본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어렸을 때에 세계 3대 미인이 누구라고 가르쳐 받은 적이 없는데, 일본에서는 어릴 때에 이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 세계 3대 미인에 굳이 자국의 여성을 끼워놓고 가르친다는 발상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다. 도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그 수많은 미인들을 비교해서 점수를 주었으며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여성가운데 서양 1명, 중국 1명, 그리고는 일본인 1명일까?

 

게다가 클레오파트라를 지금 기준으로 보면 결코 미인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2007년 2월 영국의 뉴캐슬 대학 연구팀이 기원전 32년에 제작된 로마시대 은화(銀貨)를 연구한 결과 클레오파트라는 좁은 이마에 뾰족한 턱, 얇은 입술, 날카로운 코 등 미인형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양귀비는 어떤가? 양귀비의 실제모습은 살이 약간 쪄서 통통한 편이고. 피부는 말 그대로 백옥같이 부드러웠다 한다. 그런데 양귀비가 살던 당나라에서는 발이 작아야 미인이었다고 하며, 양귀비는 발이 현종의 손에 올려도 현종의 손보다 작았다고 하니 그래서 미인으로 분류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동서양의 이 두 미인을 관통하는 기준은 없지만 요즈음처럼 갸름한 얼굴형 보다는 통통하고 건강한 얼굴이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노노 고마치(메이지 시대의 상상화)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3대 미인으로 내세우는 오노노 고마치라는 여성은 어떤 미인일까?

오노노 고마치(小野小町)는 앞의 두 미인처럼 최고 권력자와의 로맨스가 있는 여성은 아니고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년)의 와카시인(歌人)이다. 생몰연대는 809에서 901년까지, 곧 아흔 두 살까지 산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흔히 ‘미인은 박명하다’, 곧 미인은 명이 짧아서 오래 살지 못한다는 속설이 이 경우에는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와카(和歌)라는 것은, 일본어 음절을 5 ·7 ·5 ·7 ·7의 5구절 31음의 형식으로 읊는 일본 고유의 짧은 정형시로서, 오노노 고마치는 당시 활약하던 뛰어난 여섯 명의 와카 시인 중 한 명이었다. 그 여섯 명 중 다른 다섯 명은 모두 남성이고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될 정도이니 당시로서는 큰 이름을 떨친 여성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향가작가, 혹은 시조시인이라고나 할 오노노 고마치는 원래는 일본 천왕이 있는 궁중에서 시중을 들던 궁녀였으며, 무척 아름답고 재주도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를 전해주는 그림이나 기록은 없다. 다만 재색이 겸비한 까닭에 그녀에 대한 인기가 높아 그를 흠모하던 남성들이 많았으며, 요시미네노 무네사다(良峰宗貞)라는 젊은 승려는 매일 밤 그녀를 찾아오다가 99일째 되는 날에 지치고 얼어서 죽었다고 전한다.

 

그녀가 남긴 노래를 한 번 보자. 「古今集(고킨슈)」라고 하는 최초의 관찬 와카집에 전하는 그녀의 노래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이것,

 

“思ひつつ寝ればや人の見えつらむ夢と知りせば覚めざらましを”

그리움에 사무쳐 잠들면 눈에 어리는 님이여. 꿈인 줄 알았다면 깨어나지 않았을 건데

 

그리고 다른 또 하나는

 

“花の色は うつりに けりな いたづらに わが身世(みよ)にふるながめせしまに”

꽃이 어느새 색이 바랬네, 이 몸 공연히 이 세상에서 긴 비에 근심하는 동안에

 

라고 해서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섬세하고 애잔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작품 12수 가 아까 말한 「古今集(고킨슈)」에 전하고 있는데, 여러모로 16세기를 살다 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인이자 시인인 황진이(黃眞伊)에 비견되고 있다.

 

相思相見只憑夢 그리워라, 님을 만날 길은 꿈속밖에 없는데

濃訪歡時歡訪濃 님 찾아 떠난 사이에 님은 나를 찾아왔네

願使遙遙他夜夢 바라노니, 언젠가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같이 떠나서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 상사몽(相思夢)

 

蕭寥月夜思何事 달 밝은 밤이면 그대는 무엇을 생각하나요?

寢宵轉輾夢似樣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을 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 붓을 들면 때로는 제 이름도 적어보나요?

此世緣分果信良 저를 만나 기쁘셨나요?

.................알고 싶어요[月夜思]  *이 시는 황진이가 쓴 것이 아니라 현대의 양인자 선생이 쓴 노랫말을 한시로 다시 번역한 것인데 황진이의 생애를 다룬 소설인가에 쓰여진 이후 황진이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독자 포포소리님의 지적에 따라 이 사실을 밝혀드립니다. 다만 원래 제가 잘못 알고 쓴 부분에 대해서 그것을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수정해버리고 시치미떼는 것은 좀 그래서, 그냥 이 사실의 전말을 병기합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腰]를 베어내서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뒀다가

님 오신 날 밤에 굽이굽이 펴리라

 

 

고마치의 詩碑

 

황진이에 필적할 일본의 미인 오노노 고마치는 미모가 뛰어나고 글 재주가 사람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지만 그런 묘사만으로 세계 3대 미인에 들어갈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는 그 아름다움으로 해서 나라가 기울었다면 오노노 고마치는 고작 한 명의 스님을 얼어 죽게 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라면 우리의 황진이는 15살 때에 동네 청년이 상사병으로 죽을 정도로 일찍부터 많은 사람을 좌절하게 했으니, 만약에 누군가를 잘못되게 한 것이 미인의 기준이라면, 황진이가 오노노 고마치보다도 더 미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에서는 이 여성을 세계 3대 미인으로 가르치고 있고 일본인들은 이를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최근에는 양귀비가 포함되어있다는 것만으로 중국인들도 가끔씩 이 ‘세계3대 미인론’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국인이 ‘일본판 3대 미인론’을 인용하는 것은 뭐 자기들이 손해가 없으니까 그렇고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일본의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글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생각을 바꾸어보면 어처구니가 있는 생각일 수도 있다. 그것은

 

“미인을 규정하든 역사를 정의하든 우리 나름대로의 눈과 잣대로 세상을 보자. 우리가 굳이 서양 사람의 눈에 휘둘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

 

이런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우리가 일본인들에 대해서 좁은 섬나라 사람들의 시각이라고 혹 폄훼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밖에서 오는 사물에 대해서 스스로의 시각을 잃지 않고 스스로의 기준을 지키며 본다는, 우리로서는 가장 아쉬운 그 무엇을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 우리라는 사람들도 능히 중국이나 유럽 누구와 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가 이 '일본판 세계 3대 미인론‘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발상과 범위가 자기중심적이고 유치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 기본발상에 대해서는 인정해주어야 우리의 시각도 바르게 설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들이 자랑하는 미인인 황진이하고 비교해보면 어떨까?

 

황진이와 오노노 고마치는 생존한 연대가 다르다. 고마치(이름이 너무 길어서 이렇게 줄여서 쓰도록 하자)는 9세기이고, 황진이는 16세기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여자에 대한 관념은 시대에 따라서 변해왔고 근대로 내려올수록 여자들의 운명이 점점 고달파 져 온 것은 두 나라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신라시대, 고려시대에는 여성에 대한 제한과 단속이 그리 심하지 않다가 조선조 태종이후에 강화된 것이라면 그 전 신라말기에 해당하는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특별히 여성에게 어려운 상황이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고마치의 묘

 

그런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황진이와 일본의 고마치는 좋은 비교대상이 된다. 마치 우리의 ‘춘향전’과 일본의 ‘추신구라(忠臣藏)’가 두 나라 사람들의 심성과 가치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예가 되듯이 말이다.

황진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인 조선 중종 때를 살다간 인물로서 그 시기는 엄격한 양반위주의 봉건적 계급사회, 전제주의사회, 남녀차별이 심한 사회였다고 하겠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는 평생 동안 자신의 자유와 인간성, 그리고 예술의 성취를 위해 봉건사회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항했고, 기생이라는 예술가의 길과 인간으로서의 사랑, 자유와 문학에 대한 추구 등 세 가지 목표를 성취한, 어쩌면 세계사에서 드문 미인이라고 하겠다.

 

이에 비해 고마치는 아름다움과 재주는 많지만 삶의 길은 너무 평탄하고 덤덤했다고 하겠다. 태어나고 자라고 하는 이야기도 별반 없거니와 궁궐에서 시중을 들면서의 일화라던가 작품을 지을 때의 비화 등도 황진이에 비하면 너무나 적거나, 사실상 없는 편이다. 그녀를 흠모해 99일간이나 찾아왔던 그 승려가 없었다면 과연 미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녀의 삶은 평범하고 조영했다. 다만 그가 남긴 노래들이 10여 수 전하면서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질을 전해줄 뿐이다.

 

물론 고마치가 일본 미인의 대명사가 되면서 그가 태어난 아키타(秋田)현의 신칸센에는 ‘こまち(고마치)’라는 애칭이 붙어 있고, 일본 쌀 품종 중에 ‘あきたこまち(아키타 고마치)’라고 해서 아키타 현에서 나오는 품종이 있으며, 그가 마지막 죽음을 맞는 교토의 즈이신인(隨心院)에는 고마치의 화장우물과 그녀가 받은 연애편지를 묻었다는 ‘文塚(문총)’과 같은 유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녀와 관련된 많은 연극이 만들어져 공연되기도 하지만 고마치가 뛰어난 미인임을 입증할 라이프 스토리는 거의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따져 봐도 우리의 황진이가 세계 3대 미인에 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다. 그의 다양한 라이프 스토리나 풍부한 한시나 시조, 그리고 그녀의 예술가적인 기질 등은 현대 세계 각국 남자들의 시선을 끌 요소가 너무도 많다. 그런데도 오노노 고마치는 적어도 일본 사람들에게는 세계 3대 미인이 되어있고 우리의 황진이는 누구에게서건 세계의 몇 십 대 미인으로라도 언급도 되지 않는다.

 

어떤가 우리도 황진이를 세계 3대 미인으로 우리가 선정하고 우리 후세들에게 가르칠까? 아니, 그것이 너무 속좁은 짓이라고요? 그렇다면 국제사회에 역사상 최고의 미인을 뽑아서 상을 주자고 하고서 그 미인의 선정기준을 황진이에 맞춰서 정하자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