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1)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역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로서 중세 초기의 발자취를 남겼다 교부신학과 중세신학은 그의 신학체계 아래 조화를 이루었다. 그의 주요한 두 가지 신학적 체계는 죄와 은혜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354년에 로마의 속주인 북아프리카의 타카스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던 반면에 아버지 패트리셔는 어거스틴의 유년시절 내내 이교도로 지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영적인 어머니와 육적인 아버지의 혼합된 생애를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젊은 시절 방황하여 방탕한 생활을 했던 그는 극적인 회심 경험을 했다. 사도 바울과 비슷한 극적인 회심체험을 했고 그 경험이 뒤이어지는 그의 생애와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가 체험한 회심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거스틴은 수사학 교사로서 성공하여 제국의 수도인 밀라노로 갔는데 그곳에서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당시에 암브로스는 어거스틴이 전에 듣지 못했던 아주 정교한 설교를 했다. 그는 그 설교에 매료 되었다 또 친구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으로 떠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이렇게 기독교신앙에 대해 관심을 보이던 중 386년 8월에 그는 성경을 펴 놓은 채 밀라노의 한 정원에 있었다 어거스틴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갑자기 한 목소리가 가까이 있는 곳에서 나에게 들려왔다 그리고 일종의 노랫말이 계속되었다
'성경을 읽어라 성경을 읽어라' 즉시 나는 성경을 펴서 열었다 그때에 침묵속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구절이 있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이상 읽기를 원치 않았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이 문장의 끝에 도달하자마자 내 가슴은 확신의 빛으로 가득 찼고
내 의심의 그림자는 모두 일소되었다"
이런 회심 후에 그는 세례를 받았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기도와 연구의 삶으로 은신했다. 그리고 이전에 마니교에 심취했던 사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총사상을 펼쳤다. 참회록을 비롯한 대작들을 이때에 쓰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이 쓴 회심기사는 더 이상의 주석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가 10년이 지난 다음에 이 회심 경험을 썼을지라도 그것의 강렬함 때문에 아주 생생하고 자세하다. 이 회심경험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만 헌신케 했다. 그는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가 되었으며 중세 초기의 발자취를 남겼다. 교부신학과 중세신학은 어거스틴의 신학체계아래 조화를 이룬다 그의 주요한 두 가지 신학적 체계는 죄와 은혜다
자신의 경험 속에 있었던 이 두 갈등이 회심 이후에 모든 저술의 주요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카톨릭이나 개신교가 어거스틴에게 많은 빚을 졌다 카톨릭은 어거스틴의 성례신학을 발전시켜 나갔고 개신교는 어거스틴의 은혜신학을 발전시켰다 이 은혜신학은 후대에 개혁주의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2)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은총론 요약 / 이덕휴 목사
서방신학은 동방의 관점인 전체 구원역사의 과정을 은총이라는 것과는 달리
개별자가 자신의 인격적 자유로서 어떻게 구원을 찾는가 하는 것이다.
서방신학의 은총 사상에서 강조하는 것은, '각개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매개되는 하나님이 특별한 힘으로서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에 인도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은총으로 말미암아 죄악으로부터 해방되고,
자기 본연의 목표에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은총이다'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은총은 자신이 자립하는 데서 볼 수 있게 되는 자유로운 독자적인 개인,
개별자에게 주어져서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방의 은총사상은 동방과 달리 은총 문제가
인간학적 관점에서 대두된다고 할 수 있다.
즉 구체적인 개별 인간에 중점을 두고
은총이 그 인간 안에서 어떻게 인간의 자유에 의해 구원을 찾게 되는가에 관심을 둔다.
이러한 은총의 이해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Pelagius(354-450) 와의 논쟁 속에서
확실히 드러나게 되고,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전개로 인해 서방 은총론의 체계가 이루어진다.
354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펠라기우스는 380년 경 로마로 왔다.
펠라기우스는 로마는 머무는 동안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과 규칙들을
가볍게 여기는 부유한 로마 귀족의 경박한 도덕적 생활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방종주의가 대중에까지 잠입하기 이르렀다.
그러므로 일부의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시대에 본연의 기독교 삶을 강조해서 요청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들은, 인습적 이교도들이 인습적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여 저항하였다.
그 후 그는 북아프라카로 와서 살았다.
분명치는 않지만 펠라기우스와 그의 제자 켈레스티우스는 어거스틴이 죽은 후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 공의회에서 그들은 그들의 사상보다는 네스토리우스의 명백한 배척 과정에서
그들도 함께 단죄되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선과 정의에서 출발하여, 인간 즉 인간 본성은 선하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하나님으 ,가장 고귀한 속성은 선과 정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과 정의로부터 그분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들이 선하다는 사실이 나온다.
따라서 선하게 창조된 본성 그 자체는 바뀌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본성은 존재의 시작으로부터 그 마침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기 때문이다.
본성의 속성들은 우연에 의해 바뀌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본성의 죄들'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성이 악해졌더라면 본성의 죄들이란 생겨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이론에서 볼 때
인간 본성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에 그 자체로 선하다는 논리가 나온다.
인간 본성은 우연적으로 형태만 바뀔 뿐이다.
또한 본성의 몸 안에는 자유 선택으로서 의지가 속해 있다.
이성이 작용하는 이 자유로운 선택은 인간의 몸 속에서 최상의 선인데
은총을 받는 인간은 인간 본성을 찬양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과 정의를 행할 수 있다.
선의 가능성은 하나님에게 오지만 의지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인간들의 해야 할 일이다.
펠라기우스 사상은 인간이 가지는 세 가지 기능에서 유래한다.
즉 가능성과 의욕과 행동이라는 것이다. 가능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 힘으로 좌우할 수 없고,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의욕과 행동은 우리 자신의 것이며 우리에게서 생긴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가정은
그에게 있어서는 창조주에 대한 모욕으로 보였다.
그는 말하기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있으며,
아담의 죄나 마귀까지도 이 능력을 파괴 시킬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현재 인간의 도덕적 상태는 아다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와 모든 면에서 동일하게 보았다.
인간은 선과 악을 일일이 선택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조화를 이룬다는 형식적인 자유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펠라기우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 생활에 크게 작용하지 않으며,
어거스틴이 주장한 인간의 죄의 필연성도 맞지 않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이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담의 자연적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정신적 죽음에 지니지 않는다는 보았다.
아담은 본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범죄와 상관이 없이 자연사한 것이다.
그는 아담을 다만 인류와 단절된 개체로 보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인간의 아담의 타락 이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죄로 말미암아 약해졌거나 변하여진 것이 아니며
조금도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가 없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단지 어거스틴이 주장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죄의 필연성을 거부한 것이다.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미친 영향은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보기에 의한 것이다.
즉 아담의 후손들이 그에게서 어떤 허물을 전해 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 죄를 지은 그를 모든 후손들이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죄가 인간을 얽어매는 힘은 습관이며,
이 힘은 범죄의 계속적인 행위에 의해 형성되는 힘이라고 보았다.
결국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범죄하게 되고 죄를 배운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의지에 대한 논하기를,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한 일 혹은 악한 일을 행하거나 말하며 생각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이 가능성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선한 일의 원인이나 악한 일의 원인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을 처음부터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총과 더움은 개개의 행동에 대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자유의지 또는 율법과 교훈으로 주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돕는 것은 의지와 행동의 '가능성'이지 의지와 행동 자체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더 쉽게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펠라기우스의 이런 사상은 결국 인간 의지에 선을 택하도록
어떤 특별한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는 반대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세 가지 기능 중에서
첫째 가능성은 본래적 은총 또는 창조의 은총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창조의 은총과 더불어 '계시의 은총' 혹은 '가르침의 은총을 주장했고
마지막으로 '용서의 은총'을 주장했는데,
이 은총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올바르게 생동할 수 있는 노력을 하게 하며,
자신이 행한 잘못을 고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자신들이 가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상으로 볼 때, 펠라기우스의 은총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이성적 의지와 함께 원초적으로 부여된 힘으로 인해 죄없이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둘째;
율법과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 계시가 하나님의 은총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교훈은 율법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과 구원에 적합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354-430)의 사상은 이렇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하였다.
첫째: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인간이 있게 된 것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모상이로되 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영역이 있다.
그 영역을 그 대로 반영하는 분이 성모 마리아다.
인간의 영혼은 바로 하나님의 모상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셋째: 이같은 모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참여적인 모습일 뿐이다.
어거스틴의 영성의 본질적인 부분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에 있다.
어거스틴은 형상과 유사함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 교부들에게 있어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성으로 연결되었음 있음을 말한다면,
후자는 원죄에 의해 상실된 것으로 언급된다.
어거스틴 역시 말년에 유사함을 하나님과 인간의 유사함으로,
그런가 하면 형상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특수한 유사함으로 기술한다.
어거스틴은 '말씀'을 진정한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은 삼위일체의 제2격인
예수 그리스도의 새롭게 하는 능력을 통해서만 온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삼위일체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마음은 그것이 자신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적인 삶을 통해 인간은 지혜를 얻는다.
하나님과 닮을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복음 10:30)
삼위의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과 친교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믿음과 사랑에 의해 가능해진 기독교 공동체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로서의 형상인 인간이 삼위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어떻게 참여하는가에 관심 갖는다.
인간이 동물을 넘어서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데 있으며,
그것은 이성이나 마음 또는 지성으로 불릴 수 있다.
고린도후서 3:18을 어거스틴은 영적 진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것은 매일매일 끊임없이 진보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진하며 의와 진리의 거룩함에서 전진함으로써
날로 새롭게 되는 사람은 사랑을 무상한 것들로부터 영적인 것들에 옮긴다고 했다.
어거스틴에게서 신비는 그리스도의 화육에 있다.
화육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적인 삶을 사셨다. 성령은 그분을 사막으로 인도했고,
성부와 대화하게 했다. 어거스틴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겸허했고,
이 사랑을 삼위성 안에 존재하는 사랑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간주했다.
특히 그레고리 나지안주스Gregory of Nazianzus(330-389)의 영향을 통해
어거스틴은 독특한 삼위일체 신학을 발전시킨다.
성자는 성부의 완전한 본질적 표현이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한다.
성부와 성자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서로 만나며 성령은 이 사랑의 친교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성령을 사랑과 동일시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인간학은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으로 묶어지는 존재론에서 잘 볼 수 있다.
이미 고백론에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영혼을
신비한 사랑의 삶으로 이끌어가신 하나님에 관해 표현한 적이 있다.
어거스틴의 신비신학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특징은
우선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
- 이 개념은 동방교부들의 신화(神化)론에 매우 근접한다-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레네우스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373년에 사망)처럼
어거스틴 역시 성육신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성의 신화에 있음을 확인한다.
"유한한 인간이 신성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은 죽음의 참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이해를 위해 삼위일체 흔적은 탐구한다.
인간 존재를 통해 그 흔적을 찾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인간의 혼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곧 기억과 지성과 의지이며
그 중에 결정적인 것은 의지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의지는 다른 두 가지 기능 안에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의지의 고유한 속성은 사랑 곧 재결합의 욕구이다.
지식과 상이라는 하는 혼의 두 가지 주요한 활동은 애매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느 것이나 한편으로는 자신을 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초월한다.
이러한 것들은 자기 인식 또는 자기 사랑으로서 우리를 대상으로 한다.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존재와 지식을 사랑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의지라는 존재로서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인식과 사랑이란 자기 자신의 인격을 초월해서 다른 존재에로 향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랑의 고유한 영원성이다.
그러나 이 영원성은 우리가 흔히 일컫는 불멸성이 아니고
신적인 삶 곧 사랑이라고 하는 신적인 존재 근거에 참여이다.
이러한 것을 결국 인간이 신적인 것에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기에
인간의 본성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어거스틴는 그의 저서 신국론에서 인간이 육체에 따라 살 때 허약한 것이지
하나님을 따라 살 때에 허약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태초 창세기에 인간의 본성은 본래 순수하고 흠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 본성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다.
비록 어거스틴이 종종 '타락한 본성'들의 표현을 쓴다 할지라도
인간 본성 자체는 타락이나 부패로 간주한 것이 아니다.
육체의 본성 그 자체는 악이 아니지만, 육을 따라 사는 것은 확실히 악이다.
우리의 죄악이나 패덕의 책임을 육체의 본성에 돌려서 조물주를 모독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육체의 본성은 그 본질 및 질서에 있어서 선한 것이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이 모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완전하게 자유와 영원을 가진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어거스틴의 인간에 대한 출발점은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그는 원의(原義)와 완전성을 첫 사람에게 돌리는 점증하는 경향을 최고조로 밀고 나갔다.
어거스틴은 아담은 육체적인 질병에 되지 않고 지적인 재능도 뛰어났다고 주장한다.
아담은 의로움과 조명과 복락의 상태에 있었다.
아담이 가지고 있는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뜻에서 자유이다.
본디 인간의 자유란 선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선이란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을 지향하는 한 인간은 자유다.
그렇다면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은 왜 타락했나?
어거스틴에 의하면 아담의 타락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그리고 아담이 인간을 하는 이상 아담 이후의 인간은 그 원죄에 물들게 되었다.
죄로 인해 근본적인 선들은 어둡고 약하게 되었기에 조명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은 잘못이 없는 창조주에게 온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해 저질러진 원조로부터 온 것이다.
아담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은 결코 짐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담의 유일한 약점은 그의 피조성이었다.
이것은 그가 본성상 가변적이고, 그렇게해서 초월적인 선으로부터 돌이켜 떠날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어떤 비난일지라도 오직 그 자신의 의지에 대해서만 해야 하는 것이다.
의지는 비록 선을 향하고 있을지라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 선택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로서 아담은 죄된 의지를 가진 죄인이 되었다.
영혼은 하나님의 도움을 상실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육체에 대한 지배력도 상실되었다.
마음은 정욕으로 가득차게 되었으며, 저급하고 변하기 쉽고 불확실한 사물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어거스틴은 원죄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결과는 무엇인가?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이라서 아담의 죄는 인류 전체의 죄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전체로서 인간의 본성이 최초의 인간에게 이미 종자상태(種子狀態)로 나타나고 있다고 가르쳤다.
즉 개인적 행위로서의 최초의 죄는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행위였다.
그러나 인간을 집단적 공동존재로 볼 때에는, 그것은 실로 인류의 공통적인 행위이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우리는 자신해서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에는 그의 후손의 의지가 작용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전 인류의 죄이다.
어린이는 비록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모두 이러한 죄된 상태에 포함된다.
따라서 어린이도 세례를 받아아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원죄가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수단은
불순한 성질의 성적 욕망 즉 육체적 출산 행위에 의하여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키므로 어거스틴은 터툴리안
Tertullian(?-225)의 이론이 내포하고 있는 스토아적 물질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터툴리안이 주장한 영혼의 유전(죄와 더불어서 유전)이란
부모의 신체적 특성이 자녀들에게 유전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영혼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된다는 '유전설'은 기피하면서
하나님이 각 개인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창조해 주신다고 믿는 창조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창조설은 원죄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므로 어거스틴은 다시 유전설을 옹호하였다.
어거스틴의 이론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박탈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의지의 사용은 결국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끝없는 죄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는 신세인가?
어거스틴은 '아니다'라고 답변을 한다.
이 죄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은총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인간의 회복은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은총은 상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포착하게 한다.
은총의 영이 하는 일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사람에게 있는 죄는 그 본성과 반대되며, 그 죄를 치유하는 것이 바로 은총인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은총은 세례로부터 시작된다.
세례는 은총을 필요로 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관계를 맺게 하는 최초의 행위이다.
세례를 통해서 인간의 원죄가 제거된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총은 율법이 행할 수 없는 일,
즉 정욕을 이기는 일을 행하며 세례의 과정에서 성령이 인간 속에 신앙을 만들어내며,
타락을 통해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던 영적 무지를 몰아낸다.
이러한 신앙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어야 하며 소망과 사랑이 더 첨부되어야 한다.
이처럼 사랑이 주입됨으로써 인간의 의지는 점점 더 자유롭게 해방되며,
인간의 본성은 회복되어 변화되어 간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상반된 이론을 볼 수 있는데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변화는 자연적 심리학적 발전의 결과라고 하는 반면,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에 미친 초자연적 하나님이 세력의 결과라고 하는 점이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인간 스스로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의 덕분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어거스틴의 자유의지에 관한 사상은 두 단계를 거치고 있다.
첫 단계의 사상은 펠라기우스가 나타나기 전의 사상으로서,
이 때의 자유의지론이 사실상 주체는 악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자유의지론은 펠라기우스를 반대하기 위한 자유의지론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사상은 (Privatoi Boni 사상)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부터 등장한다.
따라서 이 사상은 서방 교회의 신앙의 관점에서
당시 기독교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마니교 사상을 비판 한 것,
즉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전능과 선을 반영해 준다는 당시 서방 교회의 입장을 수호하기 위해
선과 악, 영과 물질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악을 실체로 규정했던 마니교 사상을 반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거스틴은 악을 실체로 보지 않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다.
그렇다면 현실의 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 손실, 부패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의 원인은 무엇인가?
악의 근원은 인간의 자유 의지의 전도(顚倒)에 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플로티노스의 사상(유출설) 구조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이 세계에는 악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존재의 계층만이 존재하는데,
인간의 의지가 자신의 위에 있는 존재를 향하지 않고 밑에 있는 것을 향할 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물질 세계를 향할 때 인간의 의지가 전도되고
이러한 전도된 의지에 의해 악한 행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인 물질 세계나 자유 의지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세계에로 향하는 의지의 전도가 악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적 악 또는 인간의 고난과 고통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따라서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의 원인은 모두 인간의 의지의 전도에 있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악을 인간의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제시했다.
이러한 사고의 의미는 마니Mani교와 비교해 볼 때 명백해진다.
마니교는 유대교를 단호히 거부하고 페르샤 내지는 인도사상을 기독교 이념과 결합시킨 종파이다.
마니가 내세운 교리는,
영겁의 상태로부터 이미 병존하여 온 두 가지 세계에 관한 표상에서 발달된 것으로서,
즉 하나는 광명으로서의 하나님 아버지에게 지배되는 광명의 세계와
또 다른 하나는 암흑과 그의 마귀에 의해 지배되어 있는
- 마니는 이것을 유대교의 여호와와 동일시하였다.- 암흑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있어서의 예수란 광명의 세계로부터 강림하신 인류의 구세주로 보고 있다.
이 종교의 윤리관을 대단히 엄격해서 불교와 같은 고행을 독촉했고,
동물성 음식물이나 성적 충족은 물론 심지어 하찮은 수공업에 종사하는 것까지 금지시켰다.
마니교 및 영지주의에 의하면 악은 의지의 행위라기 보다는 악한 원리(어둠의 신)의 실현이다.
따라서 인간은 악한 신과 창조의 희생자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서 어거스틴의 '선의 결핍' 사상은 한편으로는 악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본성의 전도 또는 왜곡이기 때문에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악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인간에게 돌린다.
즉 악은 창조 후 인간에 의해 이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며
원칙적으로 구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창조가 선하며 악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는 확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성을 심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는 그들 자신보다는 물질과 유한 존재의 운명의 탓으로 돌린다.
따라서 자신을 창조의 파괴자가 아니라 희생자로 이해된다.
그래서 고대 세계는 유한과 역사 내에서의 구속의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유한으로부터 영원으로 비약할 때만 악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세기의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어거스틴의 이론을 비판하기를,
인간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성을 항상 무의식 속으로 숨겨놓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잠재력이 이차세계대전의 집단적 잔혹성으로 폭발되었다는 말이다.
즉 악과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해가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 비판하기를, 하나님을 사(4)위일체,
즉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의 역설적 통일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대극들의 긴장 속에 살면서 양자를 통합시켜 나가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탁월성으로 보고 있다.
즉 악은 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부정되기보다는 긍정되어야 하며,
억제 되기 보다는 인격 속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악은 삶의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뵈메(Jakob Boehme)에 의하면,
절대자 안에는 실재의 어두운 원리가 빛의 원리로 총합되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 세계에서는 이러한 조화가 상실되어 있기 때문에 실재의 어두운 원리가 악의 원리가 된다고 한다.
'선의 결핍'이론은 고대 교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실상 '선의 결핍'이론은 어거스틴 이전에존재했던 개념이다.
어거스틴의 이론은 당시 서방 교회 교부였던
암부로시우스Ambrosius(339-397)로부터 받아들였음을 암시해 준다.
또 '선의 결핍' 사상은 동방 교회에서도 나타난다.
3)어거스틴의 죄론과 은혜론
기독교 역사는 한마디로 이단들과 정통적 신앙간의 계속되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이단들이 발호하였을 때마다 공의회는 이들 이단들을 정죄하고 신앙을 수호하여 왔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수많은 논쟁들이 있어왔지만 이 논쟁들은 이단과 공의회 간의 논쟁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단과 정통적 신앙의 싸움의 역사에서 특이한 한 사건이 뚜렷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 논문의 두 대립되는 인물 즉 펠라기우스(혹은 펠라기우스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에 대한 반박은 거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의존해 있고 이 논쟁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그 어느 이단논쟁에서 보다 더 두드러진다.
고대와 중세의 한 중간지점에 우뚝 선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잘못된 사상 즉, '의지로 얻는 공로'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총'의 선재(先在)를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구원은 전혀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명백히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은혜관은 펠라기우스파와 반(semi) 펠라기우스파를 누르고 교회의 정통적 사상으로 정립되었으며 오늘날 교회의 기본적 사상이 되었다.
본 고(考)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론'과 '은혜론'을 그의 서간과 설교와 논문을 통하여 고찰함에 있어서 확장되어 가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박, 일명 '펠라기우스 논쟁'을 중심으로 기술할 것이다. 후일 케사리우스(Caesarius, 469-542)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펠라기우스논쟁1)은 논외로 하였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von Hippo, 354-430)는 A.D. 354년에 현재 알제리아(Algeria) 땅인 루미디아(Numidia)에 있는 타가스테(Tagaste)에서 비기독교인 아버지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 모니카(Monica)사이에서 태어났다.그는 카르타고(Cartage)에서 수사학을 배웠고 373년경부터 약 9년동안 마니교에 탐닉하였고 383년 로마에서 학문적 추구를 하였으나 실망하고 쾌락주의(Epicurianism)의 즐거움에 탐닉하기도 하였다.
384년 밀란의 공적연사(the public orator)가 되었으며 '고백록'에 묘사된 것처럼 387년 긴 종교적, 철학적 순례를 마친 후, 387년 밀란(Milan)에서 세례를 받았다. 388년 북아프리카로 돌아와 391년 서품을 받았고 395년(혹은 396년) 힙포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힙포의 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430년 반달족의 침입이 있는 동안 질병으로 사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란의 어떤 정원에서 로마서 13:13-14를 읽고 회심하였다고 전해지며 도나투스파에 반박하여 '삼위일체론'(The Trinity)을 저술하여 도나투스파의 재세례를 거부하고 '비록 합당치 않은 성직자에 의해 받은 성례라도 참다운 성례로 남는다'(ex opere operato)는 주장을 하였다. 411년경부터는 펠라기우스파에 대한 논박에 힘을 쏟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대표적인 저술은 [회의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행복한 삶에 대하여], [독백], [고백록], [신의 도성] 등이 있고 방대한 분량의 설교와 서간과 논문을 남겼다.
또한 그의 생애를 반대자들과 관련을 지어 정리해 보면2), ①이교도에 대항하여, ②천문학에 반하여, ③유대인에 반하여, ④마니교에 반하여, ⑤브리스길라단에 반하여, ⑥도나티스트에 반하여, ⑦펠라기안에 반하여, ⑧아리안족에 반하여, ⑨아폴리나리안에 반하여 등이 있다.
3. 펠라기우스 논쟁
1) 펠라기우스 논쟁의 발발과 전개
펠라기우스는 본래 영국사람이고 사제는 아니었으나 열렬한 금욕주의자였다.3) 그는 로마에서 자기의 수도원적 이상을 위해 운동하여 제자를 얻고4), 기독교사회의 방종과 부도덕에 반대하여 성공적으로 설교하였다.
그는 서방전통을 희랍적, 오리게네스적 신학의 관념과 결합시키고자 하였으며 펠라기우스는 아리우스에 반대하여 논쟁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결정적인 대적행위는 마니교도들을 향한 것이었는데 마니교도들에 반하여 의지의 힘과 의미를 강조하고 자기 행위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책임을 논술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마니교적 문헌, 즉 [자유의지론]을 연구하기도 했다.5)
그는 400년경, 이미 상당한 고령에 달해 있을 때, 로마에 정착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당시 대중적이었던 스토아윤리에 가까웠다.6)
펠라기우스 논쟁은 펠라기우스가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만난 카일레스티우스(Caelestius)를 통해서 최초로 공개적인 논쟁이 되었는데, 알라릭(Alaric)이 로마를 침공하기전(A.D.411)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카일레스티우스는 카르타고에 남아있었다. 카일레스티우스는 그곳에서 감독임직을 원했으나 밀란 출신의 집사 파울리누스(Paulinus)는 감독 아우렐리우스(Aurelius)가 주재하는 회의에 고소장을 내었다.
파울리누스의 고소장은 일곱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의 내용은 카일레스티우스가 이단적 사상을 가르쳤다는 주장이다. 고소에 따른 심문의 내용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개의 기록7)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한 워필드의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은 숙명적인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죄를 짓거나 혹은 짓지 않았거나 죽었을 것이다. 아담의 죄는 그 자신만 오로지 손상시켰을 뿐 인류 전체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갓 태어난 유아는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다. 인류 전체는 한편으로는 아담의 사망 혹은 타락으로 인해서 죽지 않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다시금 일어나지도 않는다.
갓 태어난 유아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영생으로 인도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도 죄가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8)
펠라기우스는 이런 사상 때문에 정죄되어 출교명령을 받자 에베소로 떠났으며 거기서 임직을 받았다. 415년 7월말 경 예루살렘의 요한이 주재하는 교구회의에 출두하게 되었으나 애초에 이 사건이 서방에서 발단된 것이라는 명분하에 로마 감독에게 다시 회부되었다.
얼마 후 팔레스타인에 머물고 있던 두 사람의 갈리아 감독들이 대주교인 가이사랴의 율로기우스와 함께 펠라기우스에 대한 고소를 제기했는데 펠라기우스는 교묘히 빠져나가 사면9)되었다. 그러나 416년 여름 중반 68명의 감독이 소집한 회의와 첫 번 회의 후 곧 60명의 감독이 소집한 밀레베(Mileve or Mila) 회의에서 정죄가 재확인되었다.
팔레스타인과 북아프리카의 결정이 다른 상황에서 북아프리카회의는 대주교좌인 로마의 감독 인노센트 1세에게 회의의 이름으로 카르타고의 아우렐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한 다섯명의 감독들이 친서를 보내어 결정을 촉구했는데 417년 1월 27일에 우호적인 회신을 얻었다.
이 답장에서 인노센트는 북아프리카의 결정에 동의하고 내적인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펠라기우스의 유아세례 이론을 거부하였으며,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가 정통으로 돌아올 때까지 출교를 명령한다고 선언했다.
단지 6주가 지난 후 본래 희랍인이었던 조지무스(Zosimus)는 이 논쟁에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던 차에 417년 9월 이들을 정통이라고 재선언하였다.
이에 반하여 417년 말 혹은 418년 초에 아프리카의 감독 200여명 이상이 카르타고에 회집 조지무스에게 답장을 보내 이들에 대한 반대 결정을 선언하였다. 이 편지는 418년 3월 21일에 기록되어 4월 29일 아프리카에 도착되었는데 황실은 로마로부터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를 추방할 것을 선언하였고 5월 1일에 카르타고회의에서 펠라기우스적 색채를 가진 교회법 9개를 모두 정죄하였다.
이런 사건의 전개 속에서 조지무스는 자신이 정통이라 선언한 이들과 함께 추방을 당하던지 아니면 자기의 선언을 번복하든지 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결국 조지무스는 카일레스티우스에게 출두를 명하였으나 그가 도시를 빠져나가자 6개월 전의 자신의 선언을 번복하고 이들을 정죄, 출교한다고 선언하고 황실의 칙령에 순응하여 이들에 대한 단호한 정죄문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엑크라눔의 율리안(Julian Eclanum)을 비롯한 이탈리아출신 감독 18명은 서명을 거부함으로 축출되었으나(그들 중 몇몇은 자기 주장을 철회함으로 복직되기도 했다), 펠라기우스 사후에도 가울(Gaul)지역을 중심으로 소위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활동이 퍼져갔다.
논쟁의 끝은 431년 교황 코엘레스틴이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손을 들어주고 496년 교황 겔라시우스(Gelasius)는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글을 금서목록에 지정하고 529년 7월 3일 오렌지의 두 번째 회의에서 신조를 채택하고 이듬해 보니훼이스 2세(Boniface Ⅱ)의 비준을 받음으로 논쟁은 마무리되었다.10)
2) 펠라기우스의 사상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로운 헌신이 구원에 결정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11)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견해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대립관계를 염두에 두고 그가 은혜를 전적으로 무시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논리일 뿐이다.
펠라기우스도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부차적으로 보거나 단지 없어도 괜찮은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이전 인류의 악한 "습관"과 구별해서 세례와 용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인간의 자유화와 "은혜로" 다시 얻은 의지의 자유와 자기 활동을 생각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해방된 자유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작용받고 규정받는 것이라고 한 데 반하여,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로운 헌신이 구원에 결정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12) 워필드도 이런 맥락에서 논쟁의 출발점을 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어거스틴의 주장과 역사가들의 인식에 비친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자유의지에 대한 그의 강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인류의 타락과 은총의 필요성을 부인하는데 더욱 큰 문제점으로 나타났다."13)
펠라기우스가 의지를 강조하게 된 것은 그의 원죄론에 크게 기인하는데, 그는 로마서 5:12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의 원죄적 본성을 추리해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단지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인류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유아들은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죄 없이 무죄하게 태어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14) 이런 그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본성은 변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캄펜하우젠의 말에 의하면, (펠라기우스의 입장에서 보면)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계속되는 죄과의 육체적 유전이라는 가설은 마니교적이고 하나님의 의에 어긋난다"15)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핵심적이며 형식적인 기본 원리는 인간의 완벽한 능력을 가정하는데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능력은 의가 요구하는 모든 사항을 행할 수 있으며-자신의 구원을 성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완벽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16)
이런 사상은 펠라기우스로 하여금 모든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의 많은 성인들도 사실에 있어서 죄 없이 살았다는 주장을 하고, 아담의 죄가 아담의 나쁜 행실로 인해서 후손들에게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 즉 원죄의 유전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인간의 유전된 죄성을 부인함으로써 그에게 있어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이 열려 지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하여 펠라기우스는 인노센트(Innocent)에게 보낸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또한 짓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고백합니다"17)라고 말한다.
원죄의 유전 혹은 본성의 타락을 부인하는 펠라기우스도 점진적인 타락은 인정한다. 이런 점진적 타락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죄짓는 습관'에 빠진 인간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모방하고 또한 거룩한 모범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 선택은 전적으로 그 자유의지를 소유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어린이는 태어날 때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이 죄 없는 상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린이가 지닌 순진무구성은 나쁜 환경과 관습에 의해서 더렵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18) 이런 맥락에서 펠라기우스는 "갓 태어난 유아들은 죄의 용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보다 차원 높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19) 유아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펠라기우스의 세 가지 주된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0)
첫째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모순된 주장으로 반박된 것으로서, 인간의 능력으로 율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죄가 없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의 많은 성인들도 죄 없이 살았다.
둘째는 원죄를 부인하는 것으로, 각각의 인간은 과거인들의 지나가 버린 행동으로부터 연유된 죄악이나 도덕적인 연약성에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셋째,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성을 지원하기 위한 초자연적인 도움 즉, 특히 선행은총은 필요하지 않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론
1) 원죄와 유전
펠라기우스는 죄의 보편성에 대하여 '인류의 오랜 세월에 걸친 죄를 짓는 습성' 즉 반복되는 의지의 행위들로 인해서 인간의 죄를 범하는 성향이 증가되어 왔다고 보았으나21)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전된 원죄를 강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타락 이전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은 수 있는 능력과 동시에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 즉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다. 즉, 아담은 완전한 견인의 선물, 즉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은 갖지 못했으나 선을 견지할 수 있는 능력, 즉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을 선물로 가지고 있었다.22)
그러나 자신의 교만과 불신앙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동산 안에 심어 둔 선한 나무를 악하게 사용하게 만들었고23) 이 죄악의 결과로 인해서 아담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과 그의 특별한 지식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즉, 타락한 인간에게는 죄에 대한 강요(necessitas peccandi)가 있을 뿐이며, 인간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care)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능력(non posse non peccare)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24) 타락 후에도 여전히 자유로왔으나 아담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는 은총을 상실했으므로 이제는 다만 죄를 짓는 쪽으로만 자유로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죄를 짓는 속성이 아담으로부터 상속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이 원죄를 후손들에게 상속으로 물려주어서 유전된다고 생각했다.25) 이러한 생각은, "아담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이며,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 집약되어 있으므로, 그의 모든 후예들은 그 안에서 단일성을 형성하고 아담의 죄책을 공유한다"26)는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원죄는 자연적인 출생에 의해 유전된다.27) 자연적 출생이란 '성적 욕망'이다. 이 성적 욕망은 '현세욕'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나쁜 것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 즉 "욕정적인 정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열을 합법적이며 고상한 방법으로 사용함으로써 음욕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증식하려는" 것에 결혼의 유익성이 있다.28)
그러나 출생은 원죄의 유전을 불가피하게 초래한다. 이러한 죄는 인간의 죽음을 가져왔다.29) 즉, 인간의 치명적인 부패로 말미암아 일정한 질병이 발병함으로써 창조될 당시의 생명의 안정성을 상실하였으며, 그들의 삶의 각 단계를 거치면서 경험하게 되는 연약화로 인하여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사망하게 된다.30)
2) 유아의 죄 문제와 세례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유아에게 원죄는 유전되어 있으나 스스로 범한 죄는 없고31) 무지와 연약함에서 오는 악이 있을 뿐32)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를 받지 않고 몸을 떠난 갓 태어난 유아는 가장 약한 정죄를 받는 자들에게 포함된다.33)
그는 "갓 태어난 유아는 실제적인 삶에서 오는 죄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중생의 물로써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의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원죄의 죄책으로 인한 것"34)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아세례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갓 태어난 유아들은 구원을 위해서 성별되게 특별히 제정하신 성례전을 통해 신자가 되지 않는다면 어둠(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35)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아들에 대한 세례의 유용성에 대하여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은 다음에 이 현재적인 세상의 삶을 떠난다고 한다면 원죄로 인해서 묶여 있던 죄책은 사라지는 것이며, 영원토록 불변적으로 그 상태를 지속할 것이며, 창조자 앞에서 의로운 자를 조명해 주는 진리의 빛 아래에서 완전하여질 것이다.36)
그는 또 말하기를,
갓 태어난 유아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와 연합한다는 필연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갓 태어난 유아는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와 연합을 이루게 됨으로써 이러한 연합을 이루지 않음으로써 받게 될 저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37)고 하였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유아들은 성찬에 참여함으로 생명을 얻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갓 태어난 유아라고 할지라도 인자의 피와 살을 먹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38)고 하였다.
5.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
1) 인간의 전적 타락과 원죄
"각각의 인간은 과거인들의 지나가 버린 행동으로부터 연유된 죄악이나 도덕적인 연약성에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 펠라기우스 죄론의 핵심이라면 "인간의 전적 타락"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의 핵심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은 원죄에 의해 <멸망당할 자의 무리, massa perditionis>에 속해 있다. 또한 어린 유아로서 죽었던 사람이라도 멸망을 받는다. 신의 특별한 은총의 행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가 있다."39)
캄펜하우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을 설명하기를,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었을 적에 그들이 모두 아담 '안에' 있었다. 그러한 한에서 그들은 아담의 죄에 가담했으며, 죄의 본래적인 자리가 인간적인 정신이고, 그 정신을 통하여 아담이 불순종과 '교만'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다.40)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우리에게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아주 강력하고 변함없는 자유의지가 있으며, 이것은 창조주가 모든 인간성에 부식(扶植)한 것이지만,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인애로 직접 매일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보호하신다"41)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그의 말을 따라 인간의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며 이 "가능성"은 인간에게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어 내는 무흠의 상태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펠라기우스의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한 말씀은 요15:15인데,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30에서 말하기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라고 하신 분이 용인하시지 않는다"42)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런 인간은 "의지와 행동의 선천적 가능성을 도울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의지와 행동 그 자체까지 돕는 은혜"43)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은혜
(1) 은혜의 수단과 효과
은혜에 대하여 펠라기우스는 "율법과 교훈을 의미한다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모범도 이 교훈에 포함된다고 하며, 혹은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44)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2에서 펠라기우스가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소개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우리가 죄를 피하도록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시는 것은 그 자신이 바르게 사시며 바른 일을 가르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45)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주장에 대하여 "우리의 모든 처신에서 주의 처신을 모범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순간 모든 행동을 위해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발언 자체에 모순된 견해가 있음을 논증한다.46)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은혜는 '죄를 피하도록 우리를 돕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그의 본성과 자유 의지 또는 율법과 교훈을 주신 일과 동일시'한다.47) 은혜를 언급할 때 펠라기우스는 언제나 율법(혹은 계명)과 연관을 짓는데, 그의 체계의 기능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가지로 요약한다.
그에 따르면, 펠라기우스는 "'가능성'에 의해서 사람은 의롭게 될 수 있으며, '의욕'에 의해서 의롭게 되려고 마음을 먹으며, '행동'에 의해서 실지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다"48)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펠라기우스의 '가능성'은 "하나님은 의지와 행동의 가능성을 사람에게 주셨으며, 은혜로 항상 이 가능성까지도 도우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한 일을 원하면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렇게 만드신다"49)라는 그 자신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의욕과 행동을 도우시지 않고, 의욕과 행동의 가능성만을 도우신다는" 주장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비판한다.50)
이런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들을 논박할 때 구분한 세 가지의 기능, 즉 '가능성'(possibilitas ; posse), '의욕'(voluntas ; velle), '행동'(actio ; esse)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는 것은 오직 '가능성'이며 '의욕'과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빌2:1351)의 말씀을 들어 그들의 은혜관을 반박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이끌어내는 효과를 '그리스도께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데.52) 그는 이 점에서 펠라기우스가 "그리스도께로 올 '가능성'을 본성이라고 하며, 심지어는 '그것에 의해서 바로 이 가능성이 도움을 받는다'라는 말로 그 가능성을 은혜"라고 한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사람은 올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실지로 오며", 이런 결과에는 "가능성의 발동과 의지의 감동과 행위의 실천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선한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불과한 것 같이, 선한 생활에 대한 상으로서의 영생도 하나님의 은혜"53)라고 말하였는데, 펠라기우스가 율법에 관심하는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율법을 완수하게 하며 본성을 해방하며 죄의 지배를 제거"54)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무엇인가?
그의 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9에 의하면55) "율법과 은혜는 아주 달라서, 은혜가 돕지 않는다면 율법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절대로 유해"하며 율법의 이용가치는 "범법자로 증명된 사람을 은혜에 가게 만들어, 거기서 해방을 받으며, 악한 정욕을 극복하기 위한 도움을 얻게 하는데" 있으며. 같은 글에 보면, 갈3:24을 인용하여 율법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데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율법에 대한 이해는56) "참으로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는 율법을 준수할 수 없으며" 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이며(롬13:10).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붓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성령(롬5:5)"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은혜의 주된 형태는 사랑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피조된 선들 안에서 즐거워하게 만든다. 도덕적 행위와 종교적인 행위에는 이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은혜가 없으면 인간의 모든 의지와 행위는 죄악된 것이 된다. 사랑은 피조물이 소유할 수 있는 피조된 성품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이요, 영향력이다.57)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의'(義)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는데,58)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14에서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확실하나, '율법에서 난 의'는 '하나님께로서 난 의'가 아니며, 은혜에 의해서 완성되는 의라야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율법의 저주의 두려움 때문에 행하는 것이므로 '율법의 의' 이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을 통해서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2) 선행하는 은혜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그의 은혜를 얻는다"59)고 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요일4:1960)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주장, 반문한다.
그러면서 그는 롬5:561)를 계속 인용하면서 이런 선행적 은혜를 인정하는 것은 "바른 신앙고백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선행하는 은혜는 무엇인가? 그는 '은혜'와 '의지'를 비교하면서 이에 대하여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4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은혜가 의지보다 먼저 있으므로 은혜는 또한 믿음보다 먼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믿음이 은혜보다 먼저 있다면, 의지 없이 믿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확실히 의지도 은혜보다 먼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의지보다 먼저 있으므로, 은혜는 모든 복종보다 먼저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사랑보다 먼저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만 하나님께 참으로 또 즐겁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은혜를 받는 사람 안에서 은혜가 이루며, 은혜는 그들에게서 이 모든 일보다 먼저 있습니다."62)
(3) 값없이 주시는 무상의 은혜
펠라기우스 논쟁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논쟁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가 "은혜는 공로에 따라 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기 위해, 그 근거로 펠라기우스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말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인용한다.63)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자유 의지를 이용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인데, 허락된 그 자유를 악용했으니, 당연히 심판과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유 의지를 바르게 사용하여 그 공로로 주의 은혜를 받으며 주의 계명을 지키므로, 당연히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공로없이 주어짐을 성서의 많은 구절64)들을 인용하며 반박하였는데 이런 성경 구절을 통하여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으면서 믿음을 받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은혜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아들의 예를 통하여 설명하기도 했는데, 그의 글 "은혜와 자유 의지에 대하여" 44에 보면 "유아들이 은혜를 받을 때에는 그 자신의 의지가 없으며, 의지의 영향으로 어떤 공로를 이미 세웠노라고 할 수 없다"65)고 말한다.
그는 "원죄에 대하여" 45에서 "갓난 아이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마귀의 속박에서 구출된다는 것"은 교회의 성례전이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면서 이것은 "믿을 만한 참된 신비"라고 말하였다.66)
그러므로 "공로에 대해 주시는 것이 아닌 은혜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뿐이며, 종말에 주시는 은혜 즉 영생은 선행하는 우리의 공로에 대해 주시는 것"이라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참으로 공로가 사람의 것인 때에는 그것은 악하며, 하나님은 그런 것에 면류관을 씌우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선한 공로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선한 공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공로에 여러분의 공로로서 면류관을 씌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선물로서 면류관을 씌우시는 것입니다."라고 응답한다.67)
(4) 하나님의 절대 주권
공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그의 사상을 엿보게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를 예지하시고 또한 그의 구원을 예정하셨으며 은혜를 베풀고 그의 구원을 이룰 때까지 견인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한 안의 일이다.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공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일에서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며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혜로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 즉, 예정에 대하여, "하나님이 장차 하실 일들을 예지하시며, 속이거나 변할 수 없는 그 예지로 그 일들을 정돈하시는 것이 곧 예정이며 이것은 절대적인 것"68)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예정'은 "하나님께서 누구는 죄를 짓고 혹은 저주받도록 예정하시는 것은 아니다.
선택된 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심에 따라서 이 '저주받을 무리'들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다.69)
(5)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란 것은 은혜가 의지 안에서 활동하여서 의지가 선을 의지하도록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은총을 통해서 의지를 증진시키시고 강하게 하시고 자극을 주셔서 의지 자체가 아무런 강요에 의하지 않고서도 선을 의지하게 만든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의지를 거스려서 구원받을 수도 없다.
은총이 의지를 움직이나 이것은 "부드러운 강요"로서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행동과 일치하도록 만들어 준다."70)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는 인간이 다시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된다는 면에서 불가항력적이다. 이것은 신적 은혜가 자율적 행동자로써 인간의 성질에 옳지 않게 의지를 강제로 시킨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의지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스스로 선한 것을 택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를 조종할 수 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가능하다.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결핍을 보충하는 목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성질의 방향이 완전히 다시 새로워짐을 위하여 필요하다.71)
하나님의 은혜는, 특히 예정으로서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나 그 영역을 넘어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그 타락의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가능성도 없다. 오직 은혜에 이끌림을 받는 것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예정론의 근저를 흐르는 사상이다.
(6) 견인의 은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믿음을 시작하며 또 그 믿음이 끝까지 견인할 수 있게 한다"72)고 하였는데, 이 같은 견인의 은혜를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주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로 사람 안에 견인을 실현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매일 견인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헛될 것입니다."73)
그는 또한 견인의 방법에 대하여 이르기를 "선견지명이 가장 투철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견인하지 않을 사람들을 견인할 사람들 사이에 섞어 넣으셔서,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도록"하셨다고 말한다.74)
3) 예정
예정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그의 글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16-38까지 방대한 분량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는 예정을 말함에 있어서 예지와 예정을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예정은 은혜를 위한 준비며, 은혜는 주시는 일 그 자체"인데 이 예정은 예지(豫知) 없이는 있을 수 없으나, 예지는 예정 없이도 있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셨을 때에 자기가 하시려는 일을 예지하셨다는 것이다.75)
하나님의 예지에 대하여 그는 말하기를7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믿을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미리 아신 때와 장소에서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시며 자기의 가르침을 전하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때와 장소에서는 모든 사람이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라고 하면서, "…구원은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왔으며, 구원이 오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 믿을 사람들이 아니면서 복음을 듣게 된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한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기가 믿게 하실 사람들이나 아들에게 인도하여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실 사람들을(요18:9) 예지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도 확실히 예지 하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예정이라고 하였는데, 즉, "구원을 받을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들을 확실히 구원하실 하나님 자신의 자비를 예지하시며 준비하셨다는 것"77)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와 예정의 현저한 실례를 유아들과 그리스도라고 말한다.78)
"유아들을 생각하거나, 신인(신인)간의 중재자이신 인간 그리스도 예수의 경우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공로가 먼저 있었다는 주장은 전연할 수 없습니다. 유아들에게 구세주께 속하게 될만한 공로가 먼저 있어서 다른 아이들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신 구세주 자신도 어떤 인간적인 공로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구세주로 뽑히신 것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말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사람의 공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말함과 동시에 예정의 현저한 예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말이다. 그는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31에서 말하기를,79)
"우리의 머리이신 분에게 은혜의 원천이 있으며, 거기로부터 그의 지체인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각 사람의 분량에 따라 은혜가 확산되는 것입니다. 저 한 사람이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되게 한 그 은혜가 모든 사람을 믿음의 시초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나신 것과 같이, 각 신자는 같은 그 성령으로 다시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죄가 없게 하신 성령이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가 이 모든 일을 하시리라고 예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도의 예정이며, 같은 이 예정이 성도 중의 성도(그리스도)에게서 특히 빛났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같은 글에서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실 분이 거룩한 영으로는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예정되신 것"이라고 하면서 "저 한 사람이 우리의 머리로 예정된 것과 같이, 우리는 여러 사람으로서 그의 지체들이 되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성도의 예정에 있어서 그것은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믿게 되기 위해서 선택된"80) 것이며, "그의 자비는 은혜에 따라 그들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고…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쓰고 계실 때에 그들을 세상에서 택해 내셨지만, 그들은 창세 전에 이미 그의 안에서 선택된 자들"81)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성결 무흠하게 되겠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택하시며 예정하신 것" 즉,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82)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파가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결 무흠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예견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도는 …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며 예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셨을 때에 하나님 자신의 역사로 우리가 성결 무구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지하셨습니다."83)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선포의 필요성을 그의 글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3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84)
"예정을 가르친다고 해서 견인하며 전진하는 믿음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 아니며…충실하며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 순종을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공로인 듯이 생각해서 교만하게 되지 말며,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하기 위해서 예정선포가 필요합니다."
4) 예지와 예정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의 예지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병행, 혼용 혹은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을 예지예정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예지예정은 17세기(1610) 아르미니우스가 죽고(1609)난 후 요한 우텐보가르트와 에피스코피우스에 의해 알미니안주의로 형성된 후 4명의 지지자들이 "항변"(remonstrane)이라는 신앙고백을 작성하고, 절대 예정론에 반대하여 가르쳤는데85) 칼빈의 제자들이 주장한 절대 예정 즉 '타락 전 예정'과의 반대 개념으로서 '타락 후 예정' 즉 예지예정이 대두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정을 말할 때 예지를 함께 말하고 있다고 해서 17세기에, 그리고 위와 같은 이유로 형성된 이 단어를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하여 사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알미니안주의의 예지예정의 골자는 무엇인가?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하여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명에 응하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 자유롭게 복음을 믿을 자들이라고 아는 자들만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또한 제약된다.
하나님이 예지하시고 선택의 근거로 삼은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의지의 결과일 뿐이다. 누가 믿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으며, 그러므로 누가 인간에게 구원을 위하여 선택될 것인가도 인간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아는 자들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통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주장으로서,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함으로써 궁극적인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인 것이다.86)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지를 말할 때 그것은 아르미니우스 식의 예지가 아니다.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19(Augustinus, 242.)를 보면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또는 예정에 의해서라고 말합니다. 또 은혜와 예정의 차이는 한 가지 뿐입니다)라는 말에 곧이어서 '예정은 은혜를 위한 준비며, 은혜는 주시는 일 그 자체인데 이 예정은 예지(豫知) 없이는 있을 수 없으나, 예지는 예정 없이도 있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셨을 때에 자기가 하시려는 일을 예지 하셨다'는 논지를 전개하는데 이것은 예정과 예지의 차이를 설명하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배려이지 예지예정을 말하려하는 것이 아니다.
4)어거스틴의 신학사상
어거스틴의 사상
* 알렉산드리아의 전통과 라틴의 전통, 소아시아 전통을 하나로 연결시켰다.
* 마니교와의 논쟁을 통해서 기독교 신관,
* 신플라톤 사상을 통해서 인식론,
* 도나투스와의 논쟁을 통해 교회관, 세례관,
*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죄, 인간, 은총론
* 신국론을 통해 역사신학.
1. 마니교
조로아스터 예언, 페르시아 종교, 영지주의, 플라톤주의, 기독교를 종합한 것.
이교적인 종파보다는 기독교에서 기원된 기독교 섹트.
- 이원론적인 태도가 특징.
- 선과 악의 대립.
- 계급구조 : 완전자, 듣는 자, 평신도
2. 교회론
도나투스와의 논쟁으로 확립
세례의 유효성을 세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 여부에 관계없이 그 기원에 있다.
그래서 성삼위의 이름으로 주어졌다면 다시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된다.
3. 인간론
⑴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해서 확립
; 펠라기우스 사상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과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①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②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 국한된다.
③ 유아는 아담의 상태와 같다.(원죄부인)
④ 은혜로만이 아니 행위로도 구원을 얻는다.
⑵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
; posse non peccare 죄를 안지을 수 있는 상태
; posse non mori 죽지 않을 수 있는 상태
; 아담이 죄를 안지을 수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담은 자신의 죄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⑶ 아담이 범죄한 후의 인간의 상태
; non posse non peccare 죄를 안지을 수 없는 상태
; non posse non mori 죽지 않을 수 없는 상태
⑷ 하나님 나라에서의 구원받은 인간의 상태
; non posse peccare 범죄할 수 없는 상태
; non posse mori 죽을 수 없는 상태
; 죄를 짓고 싶은 욕망에서조차도 해방되는 완전한 상태
⑸ 펠라기우스 이단 정죄
- 412년 칼타고 회의
- 415년 12월 Diospolis에서 24명의 감독에 의해,
- 417년 칼타고
- 418년 황제에 의해,
- 431년 에베소 회의
⑹ 영혼의 기원 문제
① 터툴리안의 영혼유전설
② 제롬의 영혼창조설
③ 영혼선재설
④ 자유의지로 들어왔다.
4. 역사이해
⑴ 배경
① 410년 8월 24일 서고트족 알라릭의 로마 침공
② 455년 반달족의 로마 함락
③ 오도아케르의 구데타
⑵ 412년 마르셀누스의 요청
⑶ 신의 도성
① 하나님의 도성 : amor dei : caritas
② 인간의 도성 : amor sui : cupiditas
③ 이 둘은 이 세상의 종말까지는 공존할 수밖에 없다.
④ 역사해석원리 :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⑤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역사.
5. 인식론
⑴ 플라톤의 사상을 정착
cf)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정착
⑵ 동방신학의 정통을 받아들여 ‘이성과 신앙’이 얼마든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이해.
;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eligam)”
; cf) 아퀴나스는 은총과 자연의 ‘완전한 조화’를 주장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한다.”
⇨ 자연의 영역과 은총의 영역,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
⇨ 세속주의의 전환점(프란시스 쉐퍼)
5)어거스틴의 대표작 참회록 요약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참회록 중 10권을 읽고
Summary
1.하나님 안에서만이 인간의 소망과 기쁨이 존재한다.
2.만물은 그 모습을 하나님께 드러낸다. 그에 대한 고백은 육신의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고 영혼의 언어와 성찰의 외침으로 이루어진다.
-당신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지금 육신의 말이나 언어로 당신에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들으실 수 있도록 나의 영혼의 언어와 나의 사상의 부르짖음으로 당신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3.하나님에게 올바르게 고백하는 자가 그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주님은 인간들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도 더욱 자세히 인간을 알고 계시기에 인간은 진실되게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을 통하여 기록하는 그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은 그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선한 사랑과 양심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4.고백을 통하여 선을 행하며 이웃을 생각한다.
-나의 선한 행위는 당신의 작품이며 당신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나의 악한 행위는 나의 실수이며 당신의 벌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나는 과거의 모습 뿐 아니라 현재의 내 모습을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또한 나의 형제들에게도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려 합니다.
5.인간은 그 자신조차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오직 주님 뿐이십니다”(고전4:4)
6.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속성인 하나님의 사랑은 감각적 지식과 이성의 활용을 통하여 인지할 수 있다.
-나는 육신의 눈을 동원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를 살펴보며 하나님을 찾았었습니다. 그러나 속에 살고 있는 것이 더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7.육체나 영혼의 능력으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내 영혼의 능력을 통하여 육신과 결합하며 육신에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6)어거스틴의 생애요약
Augustine of Hippo 출처: 라은성교수의 교회사 (Homepage) 200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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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거스틴의 생애를 적은 글이다. 그의 성경해석이라는 글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누구든 어거스틴의 생애를 읽노라면 감동받지 않을 분들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생애를 쓰면서 이러한 분에 대한 연구가 보다 많이 되어야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다. 그의 생애는 모든 이들에게주는 복음이다. 그는 신학의 거성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거성이기도 하다. 이 신앙의 세계에 있어 그 만큼 감동과 영감을 준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확신한다.
어거스틴의 생애
44세에 이른 어거스틴이 쓴 『고백록』(Confession) 안에는 자신이 체험했던 처음 사랑의 뜨거운 열정, 성령의 불길, 그리고 기름 부으심이 아직도 넘쳐흐른다. 구약성경에서 51시편을 쓴 다윗처럼 어거스틴은 젊을 때 지었던 죄들을 숨기지 않고 오고 오는 세대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진실하게 고백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온 생애를 통해 찬양하는 것과 같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이끈다. 또 기독교는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임을 알게될 것이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의 생애를 연대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Numidia)의 비옥한 땅에서 별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고 히포(Hippo, 지금은 Bonna)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타가스트(Thagaste, 현재는 Souk-Ahras in Algeria)에서 태어났다. 타가스트는 당시에 행정적으로 칼타고(Carthage)의 영향아래 있었지만 누미디아(Numidia)의 옛 왕국에 속했다. 타가스트는 문명이 발전된 도시였고1) 그 곳의 시의회원이었던 부친 파트리키우스(Patricius)는 이교도로서 신경질 많은 자였으며 가난한 자였다. 또 그는 적은 수입으로 살아가는 시민이었다.2) 어려운 가정에 태어난 어거스틴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고전적 교육이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이런 중대한 교육을 받도록 부친은 강요했다. 모친 모니카(Monica)는3)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역사 중 가장 훌륭한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지성과 영적 경건을 함께 갖춘 분이었다.
370년 타가스트에서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후, 대학교 마을인 마다우라(Madaura)에서 처음으로 문법과 수사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곳의 교수들은 이교도들이었고 신들의 동상들이 있는 공개토론(forum)하기를 즐겼다. 다음 해, 타가스트로 되돌아와서 부친 파트리키우스가 칼타고에서 교육을 마칠 수 있는 충분한 재정을 마련할 때까지 머물렀다.4) 머무는 동안 좋지 못한 행동들을 일삼았다.
371년 어거스틴은 모친과 친구이자 10세 많은 로마니아누스(Romanianus)의 후원 받으면서 아프리카의 수도였던 칼타고(Carthage)로 갔다. 그 곳의 학생들은 난폭하였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호사스러운 삶을 일삼게 되는데 사랑하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었던 때였다. 극장에 찾아가서 자신의 불운함을 달래곤 했다.5) 칼타고에서 지난 1년도 되기 전에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이제 모니카가 그의 학비를 책임지게 되었다. 법관이 되기 위한 수사학을 배웠지만 곧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소유했던 희미한 기독교 신앙 마저 점점 포기했다. 그 곳에서 불법적인 행동을 일삼으면서 향후 15년 동안 같이 했던 여인을 17세에 취했다. 372년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가 태어났다. 이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때에 나는 수사학을 가르쳤고 탐욕으로 가득 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말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님보다 세상적 학자들을 본받았으며, 기교도 없으면서 기교를 가르쳤으며 범죄한 삶을 일삼으면서 범죄치 않는 삶에 대해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 하나님, 미끄러지는 가운데 거침돌에 걸리는 모습을 보셨고 맑은 빛들을 막아버리는 연기 가운데 있는 저를 보신 주님, 나는 허무한 것을 나의 지침으로 삼았고,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그 때 나는 법적인 결혼이라 할 수 없지만 제 마음대로 한 사람을 택했습니다만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결혼에 관련된 일들, 욕정으로 충동된 것간에 차이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 가운데 자녀들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6)
373년 어거스틴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에 이르는 것은 고전7)을 접하면서 철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철학은 학교의 교과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던 시기에 키케로의 작품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참 진리를 갈구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졌기 때문이었다. 칼타고에서 허무한 것을 배워 저명해지려고 온갖 힘을 쏟았다. 그러는 가운데 수사학을 배우는 과정에 철학으로 가득찬 『호르텐시우스』를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에게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정말 이 책은 나의 애정을 바꾸어 놓았고, 나의 시선을 당신께 향하도록 했으며, 오 주여, 다른 소망과 욕망을 갖도록 했습니다.”8) 여기에서 그는 참된 행복이 영적이고 그것을 철학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때부터 어거스틴은 지고선(supreme good)으로서 지혜를 찾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어거스틴의 “첫 번째 개종”이라 부르기도 한다.9)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다시금 기도하게 이르렀고 무엇인가 변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기독교 의식을 갖도록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키케로의 작품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 안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 주여, 오직 당신의 자비, 나의 구세주이시고 당신의 아들으로만 당신의 이름을 내 마음속에서, 마치 모유로 익숙해 있는 것처럼 부를 수 있었습니다”고 고백한다.10)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11) 또 성경으로 진리를 깨달았을 때 키케로 내용의 부족을 발견하였기에 미련 없이 돌아섰다.12) 하지만 성경 연구를 하면 할수록 실망을 더해갔다. 젊은 수사학자였던 그에게 성경의 형편없는 번역들이 혐오감을 안겨다 주었다. 키케로의 문체와 너무나도 비교가 되었던 것이다.13) 지혜를 갈구했던 어거스틴은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권위에만 의존하고 싶지 않았고 카톨릭 신앙이 지성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특히 구약성경은 그에게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아직 어거스틴은 처음 신앙, 즉 그리스도에게로 되돌아가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하여 그리스도, 즉 카톨릭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영적 기독교를 찾고 찾았기 때문에 마니교에 마음을 갖게 되었다.
374년 향후 9년 동안 몸담게 될 이단 마니교(Manichaeism)에 빠지자 그를 위해 모친의 열렬한 기도를 하면서 되돌아올 것을 확신하였다. 이원론적 마니교는 빛과 어두움, 하나님과 물질이라는 두 개념이 영원하다는 것 말하였다. 그래서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14)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는데 매력을 주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말하는 진리를 말하면서 나에게 그 진리를 말했습니다. . . . 오 진리, 진리여, 내 깊은 영이 얼마나 당신을 갈망 하였는가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에게 당신의 이름을 거듭해서 말하였습니다. 건전하게도 보였고 어떤 때는 두꺼운 책을 소개하면서 말입니다.”15) 당시 마니의 제자들은 북 아프리카에서 자신들의 가르침을 비밀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16) 율법적인 기독교 진리에 반해 영적 기독교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런 철학적 종교적 체제와 관련을 가진 마니교가 어거스틴에게 지적으로 보였던 이유는 모친이 말하는 기독교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악의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 도덕적인 면에서 기독교보다 조금의 부담감이 적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의 금욕적인 삶이었다. 원하는 것을 행하면서 마니교적 원리들을 계속해서 지켜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17) 더욱이 성악과 기악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터라 그에게 매력을 주었던 것은 그들의 예배시간에 열정적으로 시편을 노래하였기 때문이다.18) 끝으로, 그에게 관심을 갖도록 했던 이유는 마니교의 신비성이 그를 넋을 잃도록 했다. 이상의 모든 것보다 어거스틴에게 매력을 주었던 것은 바로 악의 문제를 그들의 가르침에서 해결 받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고백록』에서 말하기를 “실체에 관해서 무지하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들이 ‘악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하나님은 육체적 모양을 갖추셨으며 머리카락과 손톱이 있으시냐?’ ‘많은 아내들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죽이고, 생물들을 희생시켰던 자들을 의인이라 칭할 수 있느냐?’ 이런 질문에 나는 정말 혼돈을 가졌고 답답했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4세기의 아프리카 교회는 어거스틴에게 ‘참 지혜’의 형태를 제공하는 곳으로 보였다. 그 지혜를 얻기 위해 자연스럽게 성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19) 많은 실망감을 받았을 뿐이다. ‘세련되고 다듬어진’ 책으로 기대했고:20) 고대 저자들에 대해 박식한 라틴적 용인된 방법으로만 사람들과 교통하도록 훈련받았다. 속어와 사투리는 그와 같은 자들에게 혐오감을 줄뿐이었다. 아프리카의 라틴어 성경은 무식하고 무명의 저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속어와 사투리가 많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키케로가 사랑하라고 명했던 차원 높은 영적 지혜를 성경에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천박하고 부도덕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21) 신약성경에서도 지혜이신 그리스도는 모순되는 모습을 갖고 있었다. 또 아프리카의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성경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심지어 감독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22)
어거스틴의 신학과 주석에서 마니교의 시절을 회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나님의 도시』에서도 그들의 잘못들을 계속해서 비판한다.23) 어거스틴이 개종한 후 주석적 작품들을 통해 밝힌 것은 창세기만 아니라 일반적인 구약성경에 대한 편견이었다. 창세기에 시작되는 모든 말씀들은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난후, 성경을 읽으려는 매력을 상실하고 마니교의 비판을 수용했었다. 『고백록』에서 그는 말하기를 성경이 사실이고, 영감 받았다는 것을 고백했고 시편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 한층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24)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았다고 고백한다.25) 마침내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겸손하게 고백하였다: “오 주여, 당신께서 진리이시기에 당신의 말씀도 진리이십니다.”26)
376년 고향 타가스트로 돌아와 문법과 수사학을 한 동안 가르쳤지만27) 곧 수사학을 가르치기 위해 칼타고로 되돌아와서 시인으로서의 포상을 받았다.28) 탁월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이론적 실천적 원리들 과정에 수사학을 발전시키고 후원했다. 동시에 이교도 학문을 완전히 접하기도 하였다.
382년, 즉 373년부터 시작되어 마니교에-9년간-젖혀 있었던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잘못된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382년 여름 서방 마니교도들 중 명성을 가진 감독 파우스투스(Faustus)가 칼타고에 이르렀다. 기대에 가득찬 어거스틴은 그와의 만남을 가졌지만 마니교에 대한 의심만 증가시켰을 뿐이었다.29) 그 결과 그는 회의주의(scepticism)로 빠지고 수사학을 가르치기 위해 로마로 떠났다. 383년 로마에서 수사학 학교를 개설했다. 그러는 동안, 마니교 제자들과 접촉을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고 지속했다.30) 384년 가을, 기독교의 적대자인 로마의 심마쿠스(Symmachus)와 중개인들로 역할 했던 마니교도들은 어거스틴에게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직을 제안했다.31) 어거스틴은 마니교들과의 교제를 끊기 위해 이 직책을 수락했던 것이다.32) 분명한 것은 밀라노로 떠나기 전까지, 즉 384년 말까지는 마니교도들과 교제를 가졌다는 것이다.33)
드디어 385년, 어거스틴은 로마에서 제자들의 권면을 받고 교수직을 위해 밀라노(Milan)로 옮겼다. 밀라노에 오기 전까지는 플라톤 철학적 사고, 즉 절대 진리를 가지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사고에 젖혀 있었다. 그래서 철학적 질문을 가지면서 마니교도들의 견해와 키케로와 천문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그들의 이론은 의문만 더했고 천문학자들은 분명한 것을 제시했다. 점점 쌓여 가는 의심을 그는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마니교는 신자가 지식을 얻은 후 자아를 완전히 주장할 수 있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 수많은 신비들을 말했지만 이 세상의 신비로움들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모순들이 많았고 실망하기에 이르렀다.34) 이제 어거스틴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지 의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한 동안 플라톤 학파(Academics)의 회의주의에 매력을 느껴 보았다.35) 키케로를 통해 그는 이미 철학에 눈을 뜬 상태였기 때문에 진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36) 하지만 그 진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답변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회의적 시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마니교의 가르침이 회의주의의 질문에 무기력했다는 사실이었다.37) 이리하여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플라톤 회의주의로 극복하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길을 찾을 수밖에 상황에 어거스틴은 이르렀다. 얼마 후에 기독교에 가까이 다가오면서 신플라톤주의자(Neoplatonist)가 되었다. 밀라노에 온 그가 마니교에서 벗어나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갑자기 마니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긴 시간과 과정이 필요했는데 그 첫 번째가 점점 자유적 예술, 즉 철학을 연구하게 됨에 따라 마니교의 불일치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나 다른 철학자들과 교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대신에 생애를 주도했던 플라톤 철학, 즉 회의론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카톨릭 신앙, 즉 세례 지원자(a catechumen)가 되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마니교도들의 범죄를 증명해볼 수 있는지 모든 방면으로 노력했습니다. 영적 본질을 내가 깨달을 수 있을까요? 모든 신앙의 거점들은 압도되어 내 마음에서 멀리 떠나버렸지만; 영적 본질을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철학자들의 위대한 면이 보다 폭넓은 견해들을 수용했다고 판단하면서 더욱 깊숙이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플라톤 철학(Academics)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보였고 흔들리게 보였기 때문에 나는 마니교들을 멀리해야만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나는 더 이상 그 곳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받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기소침한 나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그 곳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께서 명하셨던 카톨릭 교회의 세례 지원자가 되어 무엇인가 나의 진로가 밝혀질 때까지 그것에 머물기로 결심했습니다.38)
세례 지원자로서 어거스틴은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스(Ambrose, ca. A.D. 339-97)의 설교를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설교는 마니교적 어려움들을 소산시켰고 알레고리적 해석학을 사용하므로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 법을 어거스틴에게 제공했다. 암브로스의 영향39)을 받으면서 어거스틴은 성경에 대한 어려운 점들을 해결했으며 신플라톤 철학을 접하면서 그 과정은 매우 빨라졌다. 암브로스 영적 존재와 악을 비 존재로 보는 플라톤적 작품에 익숙했던 자였다. 악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며,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견해는 어거스틴에게 결정적인 동시에 그의 사상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또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인 장로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40)였다. 그는 암브로스보다는 훨씬 중요한 어거스틴에게 영적인 지도자며 친구였다. 그를 통해 밀라노에서 신플라톤주의를 발견했다고 볼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로 통해 어거스틴이 놀랍게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과 영원한 말씀이 무형이라는 것,41) 하나님은 존재 자체며,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피조물들은 선하며,42) 악은 하나님으로 말미암거나 하나님과 나란히 존재하는 독립적 힘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의 의지로부터 말미암는 다는 사실들이었다.43) 또 심플리키아누스는 그에게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이 들어있는 견해들이 있는 요한복음을 접하도록 했고 바울 서신들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특히 요한복음에 있는 많은 부분들을 확신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했지만 육욕으로 인해 주저하였다:
“어디서부터 악이 들어왔을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셨고, 형성하셨고, 명하셨던 어떤 악이 있었을까? 왜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시지 않으시고 방관하고만 있으실까? 왜? 어떤 악이라도 선 안에 남아있지 못하도록 하는 변화시킬 능력이 없고 무능하신 하나님은 아닐까? 끝으로 그는 왜 전능하심으로 그런 것을 만드셨을까? 혹시 자신의 뜻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영원한 것에서 나온 것이라면 왜 하나님은 과거에 무한한 시간동안 그것을 허락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것일까?44) . . . .
. . .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어떻게 “베푸시는지”를 나에게 먼저 보이셨으며 당신의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겸손한 면을 사람들에게 보이셔서 당신의 무한한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플라톤주의자들의 책들에 심취해 있던 자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나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안에서 같은 말씀을 읽었지만 많은 이유들로 동일한 결과들을 갖지 못했습니다. [계속하여 요한복음 1:1-12의 말씀이 진행된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45) . . .
. . . . 나에게 경고를 받으면서 내면의 자아를 살펴보았습니다. 나를 인도하시면서 나의 도움이 되시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의 눈으로 내 영혼의 눈보다 위에 계시고, 내 마음보도 위에 계신 불변의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은 모든 육체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의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기름이 물위에 있는 것처럼 내 마음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상 위에 있는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위에 있는 빛이 나를 만드셨기 때문에 나는 그 아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그 빛을 알며, 영원을 압니다. 사랑은 그것을 압니다. 오 영원하신 진리여! 참된 사랑과 사랑 받으시는 영원하심이여!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께 나는 주야로 행할 것입니다. 내가 먼저 당신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나를 높이 드셔서 나로 하여금 내가 볼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나를 막고 있던 연약함을 뒤로하시고, 나에게 강력한 빛을 부으실 때 나는 사랑과 두려움으로 떨렸으며; 위에서부터 들여오는 이런 음성을 듣는 것처럼 나는 당신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강한 사람들의 음식이며 너는 나를 먹어야만 하며; 너는 나를 너의 육신의 음식처럼 변화시킬 수 없지만 너는 내 안에서 변화될 수 있다.” 당신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며, 내 영혼을 거미처럼 삼킬 수 있는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이렇게 물을 때: “공간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진리가 아무 것도 아니며 유한하지도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닙니까?” 그러자 당신은 대답하시기를, “그렇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내 마음의 귀로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의 의심의 구름을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피조물들로 이해할 수도 볼 수도 없는” 진리와 함께 살지 않을 것을 의심할 것입니다.46)
심플리키아누스는 로마의 수사학자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us)47)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빅토리누스는 신플라톤주의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던 자였는데 심플리키아누스의 도움으로 그는 개종하였다. 그는 플로티누스(Plotinus)와 기독교 사상의 형이상학을 관계짓는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사상들을 심플리키아누스는 그에게 소개했던 것이다.48) 또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끼친 다른 친구는 플라비우스 말리우스 데오도루스(Flavius Mallius Theodorus)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의 책들을 어거스틴에게 빌려주었던 자였다.49) 그 외에도 신플라톤주의자들도 어거스틴은 알고 있었다.50) 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에게 여러 질문들에 대한 이성적인 답변을 주었고 영적 자유를 갖는데 공헌했다. 하지만 그 한계성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특히 『고백록』51)에서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작품들을 통해 성경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플로티누스를 연구하면서 성경에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플로티누스는 로고스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요한복음의 첫 장과 흡사했다. 하지만 로고스를 언급하지만 성육신하신 말씀을 말하지는 않았고, 십자가의 신비도 해결하지 못하였다.52) 플라톤 철학으로 인해 영혼의 눈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고, 자신의 경험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53) 하지만 진리에 대한 완전한 갈증 해소는 성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아직도 어거스틴 자신에게 있는 것은 금욕적인 삶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지성적인 문제보다도 도덕적 문제가 더욱 힘들었다. 그는 매우 감성적으로 예민한 자였다. 심플리키아누스는 빅토리누스(Victorinus)도 개종을 주저하면서도 담대하게 사도신경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고 어거스틴에게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같은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마음은 불타올랐다:
당신의 사람, 심플리키아누스가 빅토리누스에 대해 나에게 말하자 나는 그를 본받고 싶은 마음으로 불탔다. 결국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 . . 나의 의지는 나를 사슬로 묶었습니다. . . . 새로운 의지, 즉 당신께 경배 드리기를 원하는 의지와 당신으로 즐거워하기를 원하는 의지가 내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 하나님, 너무나 오랫동안 묶여있었기에 과거의 의지를 이길만한 힘이 부족합니다. 나의 두 의지, 즉 하나는 육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의지들은 내 안에서 싸우고 있으며 그들의 불일치로 인해 나의 영혼은 혼란스럽습니다.54)
자신의 의지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어거스틴에게 폰티티아누스(Pontitianus)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이전에는 수도사들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이집트의 은자 성 앤터니에 대해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설명은 가슴에 꽂힌 화살과 같았다.55) 이제 두려워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동반자들을 만난 셈이었다. 개종하기 전날, 자신의 기독교 친구인 폰티티아누스는 그에게 바울 서신들을 연구토록 했다. 다음 날, 세를 들고 있는 집에서 어거스틴은 아래와 같은 극적인 개종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내 영혼에 깊이 감추인 것을 살펴보므로 비참한 나 자신으로 괴로워했습니다. 내 마음의 눈앞에 그것들을 놓았을 때 내 안에 큰 폭풍이 몰아쳤고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자연적 감정으로서 도저히 억누를 수 없기 때문에 알리피우스(Alypius)56)로부터 멀리 떠난 이유는; 혼자 있으면서 깊은 슬픔에 잠기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멀리 혼자 떠나서 그조차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했으며 흐느껴 우는 목소리를 들었을 것으로 여깁니다. 나 자신을 치면서 어떤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의 눈물을 자유스럽게 흘렸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오 주여, 얼마나?” “영원한 당신의 화를 받을 것인가? 오, 과거의 죄악을 기억나지 않게 하소서;”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하염없이 부르짖기를 “내가 ‘내일, 내일이냐?’ 하면서 얼마나 미룰 것인가? 왜 지금이라 하지 못할까? 지금 이 순간 나의 추악한 죄들을 마무리하지 못하는가?” 이런 말들을 거듭하면서 찢어지는 나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물으면서 내 마음에 처참한 비통을 한 동안 괴로워하고 있을 때 가까운 집에서 한 어린아이가 부르는 노래를 갑자기 들었다. 소녀였는지 소년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계속하여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를 불렀다: “들어서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 단순히 어린아이들이 뛰어 놀면서 부르는 노래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노래였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고 일어나서 이것이 성경 말씀을 열어보고 보여주시는 첫 장을 읽으라 하나님의 명령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복음이 갑작스럽게 읽으면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으로 느껴서 “가서 모든 것을 다 팔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들었다는 앤터니(Anthony)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탁으로 그는 당신께로 개종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나는 알리피우스가 앉아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곳에 두었던 사도의 말씀을 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펴서 조용히 처음 직면하는 구절을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이상 읽을 수도 없었고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 문장을 끝을 순식간에 읽는 순간, 믿음의 빛이 나의 마음에 밀려들어왔고 의심의 모든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책을 덮고 손가락으로 그 곳을 끼어놓고 이 사실을 알리피우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 . . 우리는 함께 모친께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모친 매우 기뻐하시면서, 즐겁게 뛰시면서 승리에 찬 찬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보다도 훨씬 위에 계신 하나님께; 그리고 그렇게 애타게 슬퍼하며 기도하셨던 것보다 더한 것을 받으셨다는 것을 찬양 드렸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므로 나는 이 세상에서 바라는 그 어떤 것도, 아내까지도 당신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57)
386년 여름, 위와 같은 경험을 하면서 수사학 교사직을 포기하고 학문적 글들을 다시 쓰기 하였다. 그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387년, 어거스틴은 몇 달 동안 모친 모니카, 아들 아데오다투스, 형제 나비기우스(Navigius), 친구 알리피우스, 그리고 가까운 사촌들과 형제들과 함께 친구 베레툰두스(Verecundus)로부터 빌린 카시키아쿰(Cassiacum)58)의 한 별장에서 별거 생활을 하였다. 이 곳에서 시편을 읽었다. 이 때에 『회의주의자들에 대하여』(Against Skeptics)를 썼고 또 자신의 행복한 순간을 묘사하는 『행복한 생활에 대하여』(On the Happy Life)이라는 책, 끝으로 『질서에 대하여』(On Order)도 펴냈다. 어거스틴은 감독 암브로스에게서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세례를 387년 부활절 전날에 받았다. 고향을 잊지 못하는 모친 모니카는 로마의 항구 오스티아(Ostia)에서 배를 기다리는 가운데 열병이 걸린 후 9일만에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운명을 달리했다.59)
그러자 388년 어거스틴은 로마를 다시 방문했다. 옛 마니교도들을 위해 『마니교도들의 도덕에 대하여』(On the Morals of the Manichees)와 『로마 카톨릭교회의 도덕에 대하여』(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를 썼다. 그해 여름, 북아프리카의 칼타고에 도착한 그는 며칠 지나자 않아 고향 타가스트로 갔다. 고향에서 주위에 모여든 몇 친구들과 함께 타가스트에 조그마한 수도원을 세워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로마와 밀라노에서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한 목적을 삼았다. 지난 과거들을 모두 잊은 채 형식적인 교회적 삶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었던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다.60) 특히 개종 시에 있었던 성 앤터니의 삶이 그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믿어진다. 그러면서 성경을 읽고 글을 써는 일에 힘썼다. 또 그릇된 길에 있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노력했다. 과거에 자신을 도와주었고 마니교로 개종했던 로마니아누스(Romanianus)를 위해 『참 종교에 대하여』(On true religion)를 썼다. 사랑하는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죽었다.61)
389년 히포를 방문하는 동안 갑작스럽게 나이든 감독과 백성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어거스틴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히포의 감독 발레리우스(Valerius)에 의해 장로(a presbyter)로 수임 받았다. 391년 사제가 되었지만 계속적으로 수도원 삶을 지속했고 그러면서 아프리카 교회의 여러 일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시절에 어거스틴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성장했다. 감독 발레리우스(Valerius)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연구실에서 성경 연구와 교회 교리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62) 392-4년 마니교도들과 도나티스트들에 대한 글들을 썼다. 393년 10월 칼타고의 대감독 아우렐리우스(Aurelius)가 주재한 히포의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설교했다.63) 395년 발레리우스의 보좌 감독(assistant bishop)이 되었다. 396년 발레리우스의 사망으로 그의 후계자로 어거스틴이 선출되었다. 397년 『고백록』을 쓰기 시작했고 아리안들(Arians)에 대한 『삼위일체에 대해』(De trinitate)를 쓰기 시작했다. 388년 칼타고의 네 번째 종교회의 참석했다. 402년 도나티스트 페틸리아누스(Petilianus)의 서신에 대해 논박하였다. 411년 카톨릭 감독들과 도나티스트들간의 회의에 참석하였다. 413년 『하나님의 도시』(De civitate Dei)를 쓰기 시작하여 426년에 완성하였다. 414년과 417년 사이 어거스틴은 시편과 요한 서신들에 대한 설교들을 쓰면서 설교자와 주석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다졌다. 그의 초기 사제직과 감독직에 있을 때 성경 본문에 헌신하면서 보다 가깝게 다가갔다는 것에 대해 제랄드 보너(Gerald Bonner)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거스틴의 초기 사제직과 감독직에 있어 성경 본문에 가깝게 가려고 했고 헌신적으로 적용하려는 노력은 주석적이고 논쟁적인 후기 작품에서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성경 본문들을 모자이크하는 면에 완벽하게 드러난다.”64) 430년 8월 28일 반달족(Vandals)이 히포를 포위한 3개월 되는 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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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eter Brown, Augustine of Hippo. A Biography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7), 20.
2) Augustine, Confession, II.iii.5.
3) 로마제국을 증오했던 베버(Berber)인 이었을 것이다. 모친 모니카도 베버인의 이름이었고 앞으로 태어날 어거스틴의 아들 아데오다투스(Adaodatus)도 베버의 요소가 있다. W. H. C. Frend, ‘A Note on the Berber Background in the Life of Augustine,’ The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43 (1942): 188-91에 잘 설명되어 있다.
4) Augustine, Confession, II.iii.5.
5) Roy W. Battenhouse, ‘The Life of St. Augustine,’ A Companion to the Study of St. Augustine, ed. Roy W. Battenhouse (Grand Rapids: Baker, 1979), 23.
6) Augustine, Confession, IV.ii.2.
7) 어거스틴은 버질(Virgil, Publius Vergilius Maro, 70-19 B.C. The Aeneid의 저자인 로마시인), 키케로(Marcus Tullis Civero, 106-43 B.C. 로마의 정치가이면서 철학자), 살루스트(Sallust, Caius Sallustius Crispus, 86-34 B.C. 로마의 정치가)를 특히 탐독했다. 어거스틴의 초기 작품들이 이교도 고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는 H. Hagendahl, Augustine and the Latin Classics (Goteborg, 1967)를 참고하라. 특히 690-729. 하지만 어거스틴의 391-413년에 나온 작품들은 이교도 작품들의 인용이 두드러지게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8) Augustine, Confession, III.iv.7.
9) M. Peters, ‘Augustins erste Bekehrung,’ in Harnack-Ehrung (Leipzig, 1921), 195-211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안에서 두 번째 개종을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와 친숙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세 번째 개종을 교회로의 개종이며 금욕적 삶을 말한다.
10) Augustine, Confession, III.iv.8.
11) Augustine, Confession, III.v.9.
12) Augustine, Confession, XIII.v.8.
13) Augustine, Confession, III.v.9.
14) 389년에 쓴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대한 창세기 주석』(De Genesi contra Manichaeos)과 393년에 쓴 『창세기 문자적 해석: 미완성 작품』(De Genesis ad Litteram Liber Imperfectus)에서 창세기에 대한 마니교들의 그릇된 해석을 반증하는 글이다. 영어로 번역된 책은 Roland J. Teske, introduction to Saint Augustine on Genesis (Washington: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91)이다. 특히 서론에서는 두 권의 책을 자세하게 분석하여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에 대한 견해를 잘 설명하고 있다.
15) Augustine, Confession, III.vi.10.
16) 372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Vvalentinianus I)는 마니교 가르침을 반대하는 법을 발표하기도 했다. 271년(?) 마니가 죽은 후, 선교사들은 로마지역 아프리카로 스며들어왔기 때문이다. 또 297년 3월 31일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아프리카의 지방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의 공식적인 혐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E. H. Kaden, ‘Die Edikte gegen die Manichaer von Diokletian bis Justinian,’ Festschrift fur Hans Lewald (Basel, 1953), 55-68을 보라. 또 마니교의 전파과정에 대해서는 P. Brown, ‘The Diffusion of Manichaeism in the Roman Empire’ in Religion and Society (1969), 94-118을 보라.
17) Augustine, Confession, V.xiv.24.
18) Augustine, Confession, III.vii.14와 X.xxxiii.49를 보라.
19) Augustine, Confession, III.v.9.
20) Augustine, Confession, III.iv.8.
21) Augustine, Confession, III.vii.12.
22) Brown, 43. “370년대에 감독들의 권위는 ‘신적 율법’, 즉 성경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서 직접 비롯되었고 그것들을 보존하고 설명하는 책임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성경에 대해 과도한 법적 제재들로 인해 논쟁이 있었고; 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곤란한 질문들을 가져서는 안되고 단순히 “율법”만을 받아들이므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환경은 극단적 반응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칼타고의 반 기독교적 학생들과 지성인들 사이에 감돌고 있다. 그들의 임무는 ‘말을 잘하고 멋있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적 토론을 즐겼고, 하이든 공원의 웅변자들처럼 변사들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전통적인 기독교 성경을 전멸시킨다는 사실은 지성적이고 변함없는 임무였다. 그들은 ‘무조건 믿으라는 권위적 공포를 떨쳐 버리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교훈을 따르면 하나님에 이를 수 있고,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잘못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급진적 기독교인들이었고, 카톨릭인들에게는 그들이 반 기독교인들로 보였다. 그들의 사상에서 그리스도는 중심적 표상이었고 최고의 지혜의 원리였다. 참다운 지식을 갖도록 이끌었다.”
23) Augustine, City of God, XI-XIV에서 창조와 두 도시를 논하면서 언급한다. 특히 XI.110, 13, 21-2; XII.1; XV.5, 21을 보라.
24) Augustine, Confession, IX.iv.8.
25) Augustine, Confession, XI.ii.4.
26) Augustine, Confession, XIII.xxix.44.
27) Augustine, Confession, IV.iv.7와 IV.ii.2.
28) Battenhouse, 26. 그의 최초의 논설인 on the Fair and the Fit이 389년에 출판되었는데 그 중심 주제가 “My err was my God”였다.
29) Augustine, Confession, V.vi.10-11.
30) Augustine, Confession, V.x.18-19.
31) Augustine, Confession, V.xiii.23.
32) Augustine, Confession, V.xiii.23.
33) 어거스틴은 9년 동안의 마니교도들과 교제를 회상한다. Augustine, Confession, III.xi.20; IV.i.1; V.vi.10.
34) Augustine, Confession, V.x.18.
35) Augustine, Confession, V.x.19.
36) Brown, 79-80.
37) Brown, 80.
38) Augustine, Confession, V.xiv.25.
39) 어거스틴에게 끼친 암브로스의 영향을 연구하려면 F. Homes Dudden, The Life and Times of St. Ambrose, 2 vol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35)를 보라.
40) Augustine, Confession, VIII.ii.3에보면 암브로스를 가르치기도 했던 자이고 397년에는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400년에 죽었을 것이고 곧 어거스틴은 그를 “거룩한 노인(holy old man)”이라 부른다. Augustine, City of God, X.29.
41) Augustine, Confession, VII.ix.13-7.
42) Augustine, Confession, VII.xi.17와 xii.18.
43) Augustine, Confession, VII.xvi.22.
44) Augustine, Confession, VII.v.7.
45) Augustine, Confession, VII.ix.13.
46) Augustine, Confession, VII.x.16.
47) 심플리키아누스에 대해 보다 알기를 원하면, R. A. Markus, ‘Marius Victorius,’ in The Cambridge History of Later Greek and Early Medieval!!! Philosophy, ed. A. H. Armstrong (Cambridge, 1967), 331-340을 보라. 그는 플로티누스의 책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48) A. Solognac, ‘marius Victorius,’ Dictionnaire de Sciritualiste, ascetique et mystique 10 (1978): 616-23.
49) Augustine, Confession, VII.ix.13.
50) Celsinus, Zenobius, Plotinus, 등이다. Solignac, ‘Cercle milanais’ Dictionnaire de Sciritualiste, ascetique et mystique 10 (1978): 535-6을 보라.
51) Augustine, Confession, VII.ix.13-5. City of God에서도 어거스틴은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XIX.23; VII.9; X.29; VIII.5 등이다. 하지만 10권 이후부터 부정적인 견해들을 피력하기 시작한다. XII.21; XIII.16-8; XXII.25-8; XVIII.41; XIX.9; XXI.7 등을 보라.
52) Battenhouse, 30.
53) Battenhouse, 31.
54) Augustine, Confession, VIII.v.10.
55) Battenhouse, 35.
56) 그의 가까운 친구이며, 세례 받을 때도 함께 하고, 세례 받은 후, 아프리카에도 같이 동행하여 잠시동안 함께 했다. 특히 City of God, XXII.viii에서는 그를 형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Confession, VI, VIII, IX권에서는 그에 대한 글들을 쓰고 있다.
57) Augustine, Confession, VIII.xii.28-30; cf. W. Mallad, “The Incarnation in Augustine's Conversion,” Recherches Augustiniennes 15 (1980): 80-98; K. Kevane, “Philosophy, Education and the Controversy on Saint Augustine's Conversion,” Studies in Philosophy and the History of Philosophy 2 (1963): 61-103.
58) 밀라노에서 5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다.
59) Augustine, Confession, IX.x-xiii에 어거스틴은 모친과 함께 오스티아에서 마지막으로 지내면서 있었던 대화들을 회상하고 있다. 모친의 눈을 감기면서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다고 느끼지 않으며; 당신이 나를 일으키셨던 그 곳에서 세상 끝에 나를 모르신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후, 아프신 지 9일만에 56세의 나이, 즉 내 나이 33세에 나이에 종교적 영적으로 헌신하셨던 분이 육체에서 자유 하셨습니다. 모친의 눈을 감겨드리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나에게 몰아쳤고 격정을 참을 수 없었다. 마지막 숨을 내쉬자 아들 아데오다투스도 눈물을 말없이 흐느껴 울었다.” Ibid., IX.xi.28-9.
60) “그는 수도사이기를 원했으며 비이성적인 사람들로 인해 계속적으로 방해받기를 원치 않았다.” Henry Chadwick, Augustine (Oxford, 1986), 56. Gerald Bonner, St. Augustine of Hippo, Life and Controversie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3), 106-109를 보라. 여기에서 보너는 어거스틴이 수도원적 삶을 살게되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로마와 밀라노에서의 경험을 토대에서 나온 것과 학문적 마음으로 보다 학문에 증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61)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대화하여 썼던 책이 387-9년에 De misica libri vi와 389년에 De magistro가 있다. 이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과 능력, 무오한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62) Augustine, Letter, 21.3.
63) 설교주제는 『믿음과 신조에 대하여』(On Faith and the Creed)로서 기독교 진리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64) Gerald Bonner, “Augustine as Biblical Scholar,”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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