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사랑/중국 가고 싶은곳

중국여행 - 서안

별을 그리다 2008. 3. 30. 11:34

 

관광지보기...병마용갱     진시황릉    화청지    비림   대안탑
  서안시내.....종루 鐘樓    청진사   서안성벽    팔로군서안변사소기념관   흥경궁공원  興慶宮公園     섬서 역사박물관     아방궁 유적지
   근교.... 함양시 및    무릉(한무제) 곽거병 위청 묘, 무릉 박물관  화산 등산코스
               건릉    양귀비묘
   기타:   방당가무(당나라 가무)    서태후 교자연..덕발장 물만두
2. 서안 도시개요

 
서안(西安)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성도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이다. 인구 는 약 20만 명이며, 관중 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었다는 것도 감안하면, 그 당시의 시안이 누렸을 경제적, 정치적 힘이 어느 정도였는데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서안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도시인만큼 시내나 시외 곳곳에 볼거리가 많다. 중국의 어느 도 시보다도 성벽의 보존상태가 좋다고 하는 서안은 시내는 비림(碑林), 종루(鐘樓)등을 비롯하 여 볼거리를 안고 있고, 특히 교외로는 더욱 많은 고대의 유서 깊은 볼거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서안보다는 오히려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고도(古都)이다. 오늘날 서안은 중국의 신흥 내륙 공업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20여 개의 대학과 연구소들을 갖춘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중국의 군수 공장, 우주연구센터 등 핵심적인 산업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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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보기...... 서안 함양 임동(진시황릉) 화산
(서안)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기온(℃) -1 2 8 14 19 25 26 25 19 14 7 1
강수량(㎜) 7 10 25 52 63 52 99 71 98 62 31 7
2-1 병마용갱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진시황병마용(秦始皇兵馬俑)은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 다가 우연히 병마용을 발굴했다고 한다. bmyong1.jpg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진시황의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상징적인 것이다. 1974년에 발견된 후로 현재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까지 두 3개의 갱(坑)이 발굴되었는데, 그 가운데 1호갱에만 6,000여 병마가 실물 크기로 정 연하게 늘어서 있어 금방이라도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들고 달려나올 것만 같다. 이들 병사 용은 하나같이 표정이 다르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다.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은 세계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로서 서안에서 37km 떨어진 臨潼縣 동쪽 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쪽으로는 驪山, 북쪽으로 渭水와 접해있다.
▒ 1호 병마갱
거대한 돔으로 덮인 갱으로 병마용박물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갱의 깊이는 5m이고 면적은 14260평방미터이다. 갱내에는 약 6000여개의 사람모습을 한 토병과 말이 있는데 가 운데를 중심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줄을 지어 정열하여 있다. 특이한 것은 남쪽과 북쪽가의 토병들은 동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남쪽의 병사는 남쪽울, 북쪽의 병사를 북쪽을 바라 보며 서있다. 또한 동쪽에 있는 가로 3열의 178-187Cm크기의 토병들은 무사토용(武土傭)으 로서 손에는 먼곳을 저지할 수 있는 궁수병기를 쥐고 있다. 그 뒤로 약 6000여명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정열하고 있는데 손에는 창과 같은 긴 병기를 들고 서있다. 이곳에 있는 병 마용들은 대부분이 갑옷을 입고 손에 창, 긴 창, 극 등의 장병기 및 궁노 등을 들고 있는 것 으로 보아 대체로 중장비한 주력부대들임을 알 수 있다.
▒ 2호 병마갱
규모는 적지만 1호갱보다 다양한 모습의 병마용이 있어, 보병, 기병. 전차등의 3개병종을 혼 합한 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다. 1호갱이 일반 주력부대라면 2호갱은 기동력 있는 주력부대 를 보조하는 부대일 것으로 추정된다.갱내에는 기마병,보병,궁병과 전차들이 혼합된 대형군 대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크게 4등분을 하여 나눌 수 있는데 궁병들이 모여 있 는 궁병용부대, 말과 전차가 있는 전차병부대, 보병,기마병이 혼합되어 있는 부대. 기마병만 있는 부대등 4개의 부대가 서로 독립된 단위로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병마 용은 약 1300여건이며 전차가 80여량과 함께 다량의 금속병기가 출토되었다. 평면은 曲자형 태로 되어있다.
▒ 3호 병마갱
3개의 갱 중 규모가 가장 작고, 병마용의 수도 가장 적다. 규모는 가장 작지만, 그 역할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2개의 갱은 전투 대열로 진열되어 있지만, 이것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통로 양쪽에 정렬해 있는 모양이 아마 지휘기관을 보위하는 경위부대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그외에도 사슴뿔, 짐승뼈 등이 출토되었다.
면적은 520평방미터이다. 이곳은 1호와 2호갱을 통솔하는 지휘본부로서 6개의 토기 병마용 과 4마리의 말과 1대의 전차가 함께 출토되었다. 평면도는 凹자형태로 되었다.
2-2 진시황릉                                                                       top   
서안에서 진시황릉병마용갱박물관 도착 직전에 낮은 야산처럼 보이는 것이 진시황릉(秦始皇陵) 인데,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여기에 묻혀 있다. 전한의 역사가 사마천에 의하면 진시황은 그가 황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이 능을 만들기 시작, 36년만에 완 성했다고 하는데 그 때는 이미 진시황이 죽은 후였다.
세계적으로 개인을 위한 묘로서는 최대의 크기이다. 능의 높이는 약 79m, 동서 475m, 남북 약 384m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있으며, 능의 봉분 뒤에는 석류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다. 무려 70만명의 부가 동원되었다고 하는 거대한 무덤속에는 숲과 산이 있고, 황실 보석창고 그리고 거대한 석각중국지도가 있다고 한다.
능 속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서 기궁이라는 자동발사되는 화살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무 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넣었다
huaqingchi.jpg2-3 화청지              top
화청지(華淸池)는 서안에서 25㎞정도 떨어진 여산(驪山)산록에 있는 온천이다.
역대 제왕이 행궁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며 당나라 말엽 양귀비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었 던 곳으로 유명하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전해지는 역사에 의하면 西周시대에 이곳에 驪宮을 세웠으며, 진대에는 이곳에 石宇, 당나라 현종시대에는 이곳을 더욱 크게 넓 혔고 이름을 "화청궁"이라 고쳤다. 또한 이곳이 온천위에 지워졌으므로 "화청지"라고도 불리 웠다.
756년 안록산의 난으로 화청지는 불에 타서 훼손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된 것은 청 나라말부터 시작하여 1958년 대규모의 문화재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이다.
이곳은 또한 1936년 12월에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장개석은 장학량 (張學良)에게 공산당 토벌을 명하려 왔다가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장학량에게 쫓겨 이곳에 숨어 있다가 결국 체포되어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해상탕(海常湯)은 지금도 섭씨 43도의 온천물이 가득한데 일반인에 게 공개되므로 몸을 담가 볼 수도 있다. 이 화청지의 온천은 광물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목욕 후에는 기분이 상쾌해지며, 관절염과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중국 국가에서 보호하는 중요 문물 보호단위이다.
2-4 비림
비림(碑林)은 1087년 북송 철종 2년에 개성석경을 보존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현재 한(漢)대 부터 청(淸)대에 이르기까지 각 조대의 비석과 1천여개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비석들이 모여 마치 '숲을 이룬 것 같다'하여 '비림(碑林)'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개성 석경은 114개의 석판에 유교경전 13경(655,025자)을 조각한 것으로, 여기에 당대 명필 구양순과 안진경,이양수 등의 친필 석각과 조철, 소식, 조맹부 등 명사들의 진적비등이 집중 되어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 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섬 서성 박물관 안에 있지만, 박물관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서안에서 가장 기념될 만한 비석 탁본을 구매 할 수 있는데 탁본실에서 판매하는 것과 탁본위에 작은 도장이 새겨져 있는 것만 진품이다.  현재 모조품이 상당히 많으니 구매할 때 주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

2-5 대안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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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안탑(大雁塔)은 서안시 남쪽 4㎞지점의 자은사(慈恩寺) 경내에 있는, 서안시의 상징적인 탑 중의 하나이다.

서유기로 잘 알려진 당나라의 소승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의 번역 과 그것을 소장하기 위해 정부에 건의하여 세운 탑이다.

처음에는 5층탑이었으나 뒤에 10층으로 증축되었고 전쟁중의 화재로 일부 허물어졌다가 다 시 복구되었다. 현재는 높이 64m, 둘레 25m의 7층탑으로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뛰어나다.

2-6 소안탑
소안탑(小雁塔)은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다녀온 당나라 승려 의정이 귀국시 운반해온 4백부 의 경전을 번역하기 세운 탑이다. 초기에는 15층으로 높이가 45m나 되었다고 하는데 명나라 때 꼭대기 2개 층이 소실되어 높 이 42m의 13층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 탑은 복구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있어서 당나라 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서안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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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루 鐘樓 (중러우) :  시 중심에 있다. 외관 3층, 내부 2층의 누각으로, 1384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는데 1582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외기둥 양식으로 지은 진기한 건물이다. 종루 위로 올라가(유료) 시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으며 사진을 찍는데 안성맞춤이다.
청진사 淸眞寺 (칭전스):   742년에 창건된, 당(唐)의 현종(玄宗) 때부터 존속해 온 유서 깊은 이슬람 사원이다. 지금도 매일 예배시간이 있는데 그때에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시안에는 3만 명 이상의 이슬람 교도가 있으며 이 근처에 많이 거주한다.
 
고루의 서북쪽 코너에 있는 화각항(化覺巷) 내에 위치해 있다. 비교적 규모가 크고 오래되었으며, 현재에도 보존이 잘 된 이슬람사원이다. 중국의 전통 건축 풍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슬람교 사원만이 지니는 특색을 동시에 품고 있다.
당 천보(天寶) 원년(742년)에 지어졌으며, 송, 원, 명, 청대로 이어져 가면서 점차 규모가 커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체 면적은 13㎢이며, 건축 면적은 5㎢이고, 동서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장방형의 모습을 띄고 있다.
사원 내에는 약 600여점의 그림이 있고, 천명이 동시에 절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최근 20년간 세계 80여개 국가의 여행객들과 50여만 명의 이슬람 신도들이 방문을 했다.
서안성벽 西安城壁 (시안청비):    1368년에 원(元)을 무찌른 명(明) 왕조는 당의 도읍이었던 장안성(長安城) 의 기초 위에 새로이 성을 쌓았다. 1421년 베이징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50년 동안 이곳이 중국의 중심이었다. 그 성벽의 길이는 동쪽 2590m, 서쪽 2631m, 북쪽 3244m, 남쪽 3441m이고 높이는 12m이다. 위는 폭 12∼14m의 화랑으로 되어 있고, 일부는 수리하여 오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곳은 거리의 소음도 들리지 않고 역사의 흐름을 실감하는 데 적격이다. 여름밤에는 비어 가든도 문을 열어 쌍쌍의 남녀로 붐빈다.
팔로군서안변사소기념관  八路軍西安弁事所記念館 (바루쥔시안벤스쒀지넨관)
 역 근처 혁명공원 옆의 七賢坊(칠현방)에 있는, 항일전쟁 당시의 혁명 근거지이다. 표면적으로는 독일인 의사의 치과의원이었는데 실제로는 옌안(-安)으로 들어오고자 희망하는 사람에게 신분증을 발행해 주는 곳이었다. 저우언라이. 주더(朱德), 동샤오핑, 예젠잉(葉劍英) 등 중국공산당 간부도 여기서 지낸 적이 있으며, 당시의 거실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캐나다 인 의사 베쑨이나 에드가 스노도 옌안으로 들어오기 전 이곳에 체류한 적이 있으며, 국경을 넘은 전사들의 족적도 새겨져 있다.

흥경궁공원  興慶宮公園  (싱칭궁궁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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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대에 쌓은 성벽의 동쪽에 펼쳐진 공원이다. 당의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 현종이 즉위 전에 형제들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712년에 즉위하고 나서 2년 후 개축하고 이름을 융경방(隆慶坊)에서 흥경궁(興慶宮)으로 고치고 양귀비와 같이 살았다. 그 후 그는 이곳에서 정무를 보고, 과거나 국빈 접대도 모두 이곳에서 했다고 한다.
  당대의 건축물은 지금 초석이 일부 남았을 뿐인데 침향정(沈香亭), 화악상휘루(花 相輝樓)가 복원되어 있다.
섬서역사박물관
섬서성(陝西省) 최대의 박물관인 섬서역사박물관          top  
 
대안탑 부근에 위치해 있는 현대화된 1급 박물관이다. 관람하는 데에는 한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중앙에 위치한 건물은 2층 높이, 면적은 6㎢인 섬서지방 역사 전시관으로, 원시시대부터 1840년 아편전쟁 중에 섬서성에서 출토된 각종 전시품들을 전시하고 있고다. 서쪽에는 2500㎡의 주제 전시관이 있는데, 주로 실크로드 등 섬서성의 역사, 문화 등에 관련된 문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주요 전시품은 청동기, 도용, 금·은 장신구, 당나라 무덤 벽화 등이다.

동쪽에 있는 2555㎡의 역사문화전시관에는 주로 중국과 외국의 문화 교류를 주제로 한 전시품들이 있으며, 전국 각 성과 시의 문화 전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은 현대적인 시설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전시관 내에는 문물보호 센터, 도서관, 다용도 학술보고실 등이 갖춰져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전시품과 자료 관리를 하고 있으며, 자동 조절 에어컨과 인공 조명시스템, 6개국어 동시통역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함 양(Xianyang)                          top
당대의 함양은 창안은 현재의 서안성과 비교할지라도 4배 가까이 크며 시안의 북서쪽 26km 지정에 위치하는 오늘날의 함양과 인접해 있었다. 현제의 함양에 해당하는 곳에 진의 시황제가 도읍을 정하고 아방궁을 지었는 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면 이어서 한의 고조와 무제가 현재의 시안 시내에 장대한 장안성(장락궁,미앙궁)을 쌓았다. 시가지는 황하 지류인 위하 북안에 형성되어 잇다
함양 박물관 : 명 대에 지은 공자 묘를 수리해 박물관으로 꾸민 것이다 인구 50만 정도에 불과한 작은 도시의 박물관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전시 내용이 추실하며 시안에서 일부러 찾아 가서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잇다 주된 내용은 지의 도읍이엇던 고장답게 진 한 시대에 유적에서의 출토문물이 중심으로 되어있다
소릉 : 당의 2대 황제 태종 이세민의 능으로 당대 능묘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67개나 되는 배 총의 하나 서무공의 묘 옆에는 박물관이 있다
건릉:  소릉에서 남서 방향으로 30km떨어진 첸센에 있으면 표고 1048m 의 산이 그대로 능묘로 되어 잇다
당의 3대 황제 고종과 그의 비 측천무후의 합장 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 내부는 도굴이 되지 않았고 아직 발굴이 되지도  않아 금후 조사가 기대 된다. 500m의 참배로 에는 120체의 석상이 늘어서 잇다 17의 배 총 중 5기가 발굴 조사 되었으며 그 출토품 43000정미 건릉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건현 북쪽의 양산 전체가 능으로 그 거대한 규모에 놀라게 된다. 능은 아직까지 완전히 발굴되지 않았으며, 입구에 도착하면 망을 타고 능을 들러?는 상인들이 다투어 다가온다.
건릉은 당태종의 아들이 고종(684년)과 그의 처 측천무후(706년)를 합장한 묘로 현재까지 발굴중이다.
고구려 멸망(668년 보장왕) 백제 의자왕 멸망 시킨 황제 능의 입구 좌우에는 고종의 장례에 참가했던 소수민족의 수령과 외국사절의 조각상 61개가 있고, 내성의 네문에는 대형사자상이 각각 하나씩 있다
 
양귀비묘                                              top      
흥평현 마외파에 있다. 백낙천의 장한가에서 후궁가인 이 3천명이 있는 데 3천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앗다고 했던 양귀비의 묘이다. 756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게 되자 현종은 얼마안되는 호위군을 이끌고 도망하였다. 인마가 마외파에 이르러 군사들은 양귀비와 오빠 양국충을 교살 했다. 이듬해 현종은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초라한 무덤을 만들게 되었다
무릉           top
함양 서쪽 80km지점에 잇는 무릉은 높이가 42m 총면적이 5400제곱미터나 되며 당시의 성벽이 지금도  남아 잇다.
한의 무제는 기원전 89년에 죽은 뒤에
  무릉에 묻혔다고 한다
무제는 54년이나 황제로 있있으며 중앙 집권정치의 강하나 실크로드의 개척, 변경 개척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무릉은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능에 수용된 물건은 190종, 그 중에 살아있는  말이나 호랑이 등도 있고 묘실에는 습기를 막기위해 모래를 넣었다고 한다. 완성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소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