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림(碑林)을 찾아서 비림(碑林)이란 중국 서안의 산시성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1095기의 비석을 일컫는데 청나라 때부터 한나라 때와 당나라 때의 여러 석비를 공자묘에 모은 것이다. 비림이 처음 세워진 때는 송나라 때에 당나라 시기의 `석대효경(石臺孝經)’과 `개성석경(開成石經)’을 조각한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한다. 그 후 점차로 늘어나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2천300여개에 달했다. 비석이 한곳에 많이 몰려 있어 비림이라고 칭한 것이다.
서안 비림은 당나라 이래 비석, 묘지가 가장 많이 보존된 곳으로 서예의 전시장이며 변천사를 읽을 수 있는 교과서 다름 아니다. 비림에는 전서, 예서, 초서, 진서, 행서 등의 여러 서체와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이양빙, 안진경, 유공권 등 명필들의 글씨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서안비림은 곡부에 있는 공묘비림, 서창의 지진비림, 고웅의 남문비림과 함께 중국 4대 비림이 그것이다.
이곳 서안 비림에는 당나라 때의 그 유명한 1천095개의 석비가 여섯 개의 방에 나뉘어져 전시되어 전시돼 있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명필이 새겨져 있다. 이중 당나라 때 만들어진 고대 페르시아문자가 한자와 같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서안이 그 옛날 국제적인 도시였으며 실크로드의 출발지답게 서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고대 페르시아 문자는 이집트와 인도에 각 1점씩, 세계를 통틀어 3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또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눈길을 끈다.
특히 관우가 조조에게 잡혀 감옥에 갇혀서도 유비에게 충성맹세를 대나무 잎에 형상화한 한시에서 `신의’이란 의미가 깊이 와 닿는다. 우리는 `신의’란 말을 밥 먹듯이 해대지만 정작 어려운 상황이나 역경에서 과연 자신의 주군을 위해 또는 상사를 위해 소속을 위해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다지만 휘어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배신의 칼날로 되돌아 오는 게 요즘 세태인 것 같으니 말이다.
역사는 반복되며 반복된 역사는 교훈으로 우리에게 전해오지만, 이런 충성스런 관우를 거느린 유비가 그립고 충성서약을 한 관우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휘어진 대나무는 조조가 아무리 금은보화로 관우의 마음을 돌려 조조의 부하로 만들려고 해도 관우의 마음은 일편단심 유비에게만 있다는 뜻이며 이 말을 대나무 잎으로 글씨를 묘하게 그려 놓았다.
비림 입구에는 공자의 뜻에 따라 반원으로 만든 연못이 인상적이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평생을 걸쳐 얻는 지식은 완전한 원형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의미를 담아 반원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한다. 비석의 글씨체를 탐구하고 공부하기 위해 많은 유생들도 이곳 비림을 찾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작은 다리에서 공자의 말을 되새기며 항상 겸손함을 가지고 향학에 임했을 것으로 미뤄 짐작된다.
비림박물관 들여가는 건물 편액의 `碑林(비림)’의 편액글씨를 보면 `비’ 자의 획이 하나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청나라 장군 임칙서가 쓴 것인데 그는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 당시 서안에 왔다가 광동성으로 가는 중에 비림의 현판을 남기면서 전쟁에서 승리하면 서안에 돌아와 점을 찍겠다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패하고, 남경조약이 체결된 뒤 신강에 가서 죽고 말았던 것이다.
현판을 지나면 제1실 앞에 거대한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가 나타난다. `효경’은 공자와 그의 제자 증자가 효에 대해 문답을 나눈 것인데 큰 글자는 당 현종 때 이융기가 공자 효경의 원문을 예서체로 쓴 것이며, 작은 글씨는 현종이 해서체로 쓴 주석이라 한다. 양귀비와의 로맨스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현종이지만 시와 서예, 음악, 미술에 능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비림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가운데 문은 과거급제자만 출입할 수 있었고, 양쪽의 두 문으로 유생들이 출입했다 한다. 문묘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정원과 여섯 개의 정자가 양쪽에 세 개 씩 있었는데, 한군데만 제외하곤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옆에는 당나라 경운종이라는 커다란 종이 있는데 서안성 한가운데 있는 종루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 한다. 중국에서도 매년 정초에 우리의 보신각종처럼 이 종을 울린다 한다.
비림 제1실에는 총 12부의 경서, 65만자를 114개의 비석에 새긴 비석들이 있었다. 당나라 문종이 당현탁 등에게 경서를 베껴 쓰게 하여 837년에 이 석각이 완성되었다. 이후 여러 곳으로 흩어진 것을 북송 때에 다시 수집한 것으로 돌에 새겨진 경전이라는 의미에서 `개성석경(開城石經)’이라 불리운다. 특히 제1실에 전시된 `開成石經(石刻13經)’은 114기의 석비에 총 65만 252자에 이르는 한자가 새겨져 있어서 엄청난 수량과 그 글 자체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자아냈던 것이다.
개성은 당 문종의 연호로 개성석경은 당나라 개성년간 만들어져서 이와 같이 불리워지는 것이다. 당시에는 인쇄기술이 없어서 책의 내용을 보고 베껴서 공부했는데 도중에 잘못 쓸 수 있기 때문에 이곳의 비석들을 보며 확인을 했다 한다. 한 마디로 교과서의 원본 같은,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두꺼운 돌 교과서라 보면 될 것이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보아야 할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여러 명이 쓴 관계로 글씨체도 달랐는데 그동안 무수히 많은 탁본을 하면서 비석이 심하게 마모되어 지금은 유리로 싸서 보관하고 있었다. 비석의 색도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검게 물들어 있었다.
제2실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유물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전파상을 알려주는 유물로 알려져 있다. 머리부분에는 `大秦景敎流行中國碑(대진경교류행중국비)’라는 9자가 3행으로 새겨져 있다. 본체에는 한자와 고대 로마어로 당나라 시대에 페르시아의 알루뱅에 의해 중국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재미있는 일은 땅속에 묻혀있던 이것을 발견할 당시 영국의 윌슨이라는 사람이 이 비석을 사고자 했으나 허가가 나지 않자 탁본을 해가서 이를 보고 다시 비석으로 새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조품이 전 세계에 4개나 된다고 하니 말이다.
또 2실에는 당나라 안진경의 풍만한 필체와 유공권의 해서체, 왕희지체, 구양순체 등을 볼 수 있는 다양한 비석이 있었다. 고대 서예 대가들의 각종 글씨체로 이루어진 비석들이 산재해 있어 이 비림이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3실에 들어서니 구멍이 뻥 뚫린 비석이 있었다.
제4실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관우가 유비에게 보낸 `관제시죽(關帝詩竹)’과 달마에 관한 `달마동도도(達磨東渡圖)’, `달마면벽도(達摩面壁圖)’가 새겨진 비석이 그것이다.
不謝東君意 丹靑獨立名 莫嫌孤葉淡 終久不凋零
ㅡ`동군(조조)의 후의에 감사하고픈 마음은 없네
홀로 붉은 마음으로 청청한 이름을 세우려 하네
다른 잎이 다 떨어지고 난 뒤 외로이 남은 나뭇잎을 싫다 하지 말게
끝끝내 시들어 떨어지지 않으리니
관우는 위, 촉, 오의 삼국이 각축을 벌일 때 금전과 명예를 초탈하여 존경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덕과 용기를 기려 사람들은 그 호칭을 성인의 반열에까지 높여 ’관제(關帝)`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조는 이런 관우를 휘하에 두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였지만 관우의 마음은 한결같이 도원결의의 주군인 유비에게 가 있었다.
얼핏 보면 대나무 그림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댓잎으로 교묘하게 쓴 편지인데, 그 뜻을 알아차린 조조는 자기의 노력이 헛수고임을 알고 단념했다고 한다. 그림으로 편지를 쓰려고 한 발상도 기발하지만, 그것을 한눈에 알아차린 조조 또한 현명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달마의 비석은 유리에 싸여 ’관제시죽` 앞쪽에 있었는데 달마는 원래 남인도 향지국의 왕자였으나 출가하여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에 통달했다고 한다. 부처님의 정법을 전하기 위해 당나라때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데 ’달마동도도`는 달마가 양자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것이고, 달마면벽도는 9년 동안 소림사 달마굴에서 벽을 쳐다보고 수련중인 모습을 담은 것이다. ”달마 스님이 갈잎과 같이 작은 배를 타고 오셨다“는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 작은 배를 아예 갈잎으로 그려버렸다 한다. 각진 부분은 강하게 새기는 각법으로 제작하여 더욱 그림의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비림에는 많은 비석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왕희지의 필체가 조각된 비석을 보니 글자의 크기가 고르지 못했는데 이는 여러 곳의 글씨들을 모아 비석에 새겨 놓았기 때문이며 술에 취하여 제멋대로 갈겨 쓴 글씨들도 섞여 있어 그렇다고 한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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