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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우리魂 ..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
<>대마도의 역사적 진실
“통한다!”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 해안의 한
국전망대에 오르면 부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
다. 해질녘이면 부산의 야경이 빛나고, 카메
라 줌을 당기면 광안대교의 불빛까지 선명하
게 찍힌다. 여기 저기 휴대폰을 꺼내들고 문
자메시지를 받거나 통화하는 한국인 관광객
들의 모습이 보인다. 취재팀도 휴대폰을 켜보
니 액정화면에 안테나 5개가 기운차게 뻗어
올랐다. “휴대폰이 터지는 곳은 우리의 영토
입니다”라는 모 통신사의 광고카피가 떠올랐
다.
●서울에서 열차와 배로 6시간 거리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인 반면 대
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저
녁 때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술도 마시고 영
화도 보고 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왔던 것
을 기억한다. 이후 오랫동안 부산∼대마도 간
뱃길이 끊겼으나, 1999년 정기여객선이 운행
되면서 대한해협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올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취재팀도 서울에서 오
전 6시에 KTX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오전 10
시반에 여객선으로 갈아탄 뒤 정오쯤 대마도
최북단 히다카스 항에 닿을 수 있었다.
●한국의 자연과 역사가 숨쉬는 섬
대마도에는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
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
이나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쓰라린 민
족사의 현장도 도처에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
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
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譯官
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놈들이 주
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틴 면암 최익현
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島主) 가
문으로 출가한 덕혜옹주(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등.
●본디 경상도 계림에 속한 우리 땅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또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
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
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
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
토는)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
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
(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
토로 표기했다.
●조선의 고을로 인정해 달라는 상소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
터 있었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
(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
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졌다. 1419년 이종무 장군
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
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
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코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그래서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일본의 대마도 편입은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
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
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번이 조선
의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
백 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지금의 서계부터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이와 관련, 전북대 하우봉(河宇鳳) 교수(사
학)는 “일본과 청(淸) 양쪽에 조공을 바친 오
키나와의 류큐(琉球)왕국처럼 조선후기의 대
마도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예속된 ‘양속(兩
屬)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
다.
●이승만의 “대마도는 우리 땅” 선언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
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
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이 대통령은 바다에도 ‘이승만 라인’이라는 어업구역을 설정해 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붙잡도록 했다.
재일조선인 거류민단 대마도본부 이신연(李新演) 단장은 “이 대통령의 선
언이 나왔을 때 대마도에 살던 일본 주민들은 ‘한국이 독립을 해서 미국의
힘을 업고 대마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제 곧 일본사람들은 쫓겨나게 생겼
다’며 크게 불안해했다”고 회고했다.
●독도문제보다도 입증할 자료 많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면
서 제시하는 증거보다는 대마
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
는 사료가 훨씬 풍부하다. 또한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적
인식보다도 대마도에 대한 한
국인의 역사적 인식이 훨씬 깊
다.
하 교수는 “섬을 비워놓는 ‘공
도(空島)정책’ 탓에 조선이 대
마도를 영토적으로 복속시킬
기회를 놓쳤다”며 “그러나 일
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근거보다 한국의 대마도영유권 주장근거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는 차원에서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마도=특별취재팀
역사가 증명하는 우리땅 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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